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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엿장사 마음대로

153뉴스 tv 2007. 1. 17. 14:05

 

근 70년 엿 팔아온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엿장수가 된 지 올해로 5년째. 작년에 엿을 팔아 2억원을 벌었다. 만으로 서른여섯인 돼지띠 아들이 세운 올해 매출 목표, 놀라지 마시라, 자그마치 3억원!

아버지는 평생 장터를 떠돌았다. 엿을 팔며 방방곡곡 돌아다녔다고 이름도 팔도(八道), 윤팔도로 바꿨다. 원래 이름은 윤석준, 올해 81세다. “진짜로 엿장수 마음대로” 번 돈 막 써가며 66년 동안 엿을 팔았다. 그런데 대학 졸업하고 직장 다니던 막내아들이 “나도 엿 팔라요”하고 회사를 때려치웠다. “그놈을 죽이고 싶었어유…. 죽으라고 돈 벌어서 공부시켰더니 한다는 얘기가….” 2003년이었다. 4년제 대학 나온 아들 일권(36)씨가 엿판에 뛰어든 지 올해로 5년째다. “사업 비전이 보였고, 엿 장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충북 청주 운천동 무심천변 뒷골목에 ‘윤팔도 전통엿’이라는 가게가 있다. 윤 옹 부자가 운영하는 엿 공장이다.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나이 일곱에 가난 떨치려고 남사당패에 들어갔는데, 무조건 두드려 패더랍니다. 7년 만에 도망가서 엿장사를 만났다지요.” 동지섣달, 홑고무신 신고 계룡산 속 엿방(엿 만드는 공장)에 갔더니 장작불 지펴 놨지, 엿물로 밥지어 먹지,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머슴으로 지내며 가끔 남사당 가락으로 용돈도 벌며 살았다.

해방이 되던 해, 열아홉 살 윤씨는 고참들 곁을 떠났다. “상술을 부려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음악을 알고, 재주가 있으니 다르게 팔아보자고 했어요.” 우선 ‘몽둥이만한’ 엿을 만들었다. 다른 이들이 엿판을 목에 걸고 다닐 때 리어카에 엿판 세 개를 얹고 장작처럼 엿을 쌓아 올렸다. 북 하나 사고, 카세트테이프가 들어가도록 개조한 라디오도 샀다. 엿가위도 장단 맞추기 용으로 두 개 장만했다.

애들이 싸우기만 해도 구경거리가 되던 시절, 몽둥이 엿장수가 나타나면 사람이 구름처럼 몰렸다. 한바탕 장단을 펼치고서 엿장수가 고지한다. “고철은 안 받고, 양은, 구리, 신주(황동·청동 따위) 셋 중 하나 가져오면 몽둥이 하나!” 쌀 한 가마가 2000환 하던 시절, 하루 2만환도 벌어봤다. “팔도가 나타나면 개도 갈비를 뜯는다”는 말이 돌아다녔다.

“엿장수라는 게 지조도 없고 남 조언도 못 받는 직업이라 ‘엿장수 마음대로’라고 해요. 어디에 써야 하는지도 모르니까 버는 족족 술 받아 먹었죠.” 결혼은? 충남 광천 장바닥에서 윤옹 장단에 빠진 여자랑 결혼했다. “엿장수한테 누가 딸을 줘요. 그래서 같이 고향 논산으로 야반도주했어요.”

그리하여 광천 처녀 김종숙(70)씨에게 고생문이 활짝 열렸다. 하나 둘 낳은 아이가 5남매. 엿장수 남편은 허구한 날 집을 비웠다. 일권씨는 “쌀 떨어지면 우리 어머니가 벼 이삭 주워서 우릴 먹여 살렸다”고 했다.

그러다 1985년 KBS 전국노래자랑대회에서 엿 팔 때 부르는 장단 ‘엿불림’으로 인기상을 받았다. “…불량 철통, 냄비, 못쓰는 주전자… 아, 별 볼 것 없다고 확 차버린 헌 마누라도 주세요~!” 이를 계기로 밤무대에서도 돈을 벌다가 ‘12시 이후 유흥업소 영업금지’ 조치로 다시 엿장수로 돌아왔다. 일권씨는 그런 아버지가 창피했다. “엿불림 소리가 2㎞ 밖에서도 들려요. 그러면 뒷골목으로 빠지곤 했어요.”

윤옹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2003년 5남매의 막내(일권씨)가 엿장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문득 60년 동안 한가지 일만 해온 아버지가 존경스러운 거예요. 돌아가시면 엿불림도 끊길 거 같았고….” 아버지는 “죽으면 죽었지 안돼”라고 했다. 그러다 “아버지 엿불림 내가 보존하겠다”, “엿으로 부자 된다”는 설득에 한번 시켜봤더니, “음악 배운 놈답게 엿불림도 잘하고 엿도 잘 만들더라”는 것이다. 일권씨는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아들은 엿 ‘사업’을 시작했다. “웰빙이잖아요. 엿이 천연재료로 제대로 만들면 이만한 건강식이 없어요. 폐백 때 쓰는 이바지음식에도 엿이 꼭 쓰이니까, 뭔가 보이더라고요.” 아들은 전국 예식장과 호텔을 돌아다니며 유통망을 만들었다. 온라인 판매도 시작했다. 엿에 녹차, 인진쑥, 인삼 같은 재료도 첨가해 ‘색깔’까지 갖췄다. 엿 ‘상술’의 대변신이었다.

엿장수 경력 60년 넘는 노련한 아버지는 2002년 한 해 2000만원 벌었다. 하지만 엿장수 경력 2년 초보 아들의 매상은 2004년 가볍게 1억원을 돌파했고, 지난해에 2억 원을 넘겼다. 부자는 엿불림 가락 보존을 위해 CD도 만들었다. “근대사에 사라질지 모를 엿불림을 민속자료로 보존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윤옹은 뇌졸중에서 회복돼 다시 엿가위를 잡고 있다. “폐백 시장이 2000억원이에요. 10%는 잡을 자신이 있어요.” 징그럽도록 가난했던 세월, 그 세월 넘긴 돼지띠 아들이 큰소리친다.


출처 : 은혜(恩惠)
글쓴이 : 은혜 (恩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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