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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한일교회(담임 권의구 목사)는 지난해 12월 15일 국민일보 전정희 논설위원을 강사로 초청해 특강 가져

153뉴스 tv 2020. 1. 4. 20:00




전주와 군산교계에서 130여 년의 전북지역에 복음을 전한 초기 선교사 및 초대교회와 성도들의 발자취를 담아내기 위한 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 설립 추진에 그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의 경주를 다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 역사 재고와 함께 다음세대에게 믿음을 전수하기 위한 취지이기도 하며 특히 복음의 역동성을 통한 다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기에 군산한일교회(담임 권의구 목사)는 지난해 12월 15일 오후 2시 국민일보 전정희 논설위원(종교국부국장)을 강사로 초청해 ‘오긍선 선교사 통해본 군산과 한국근현대사’ 특강예배로 드렸다.

이날 가진 세미나는 예수님의 유언이며, 대 지상명령에 순종해 땅끝까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지나온 복음의 과거를 먼저 숙지해야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에 군산한일교회는 초대 군산지역 교회의 선교부에서 보배로운 믿음의 사람 오긍선 선교사를 알아보기 위한 시간을 가졌다.

오긍선 선교사와 알렉산더 선교사의 만남은 동역자의 관계를 넘어 복음의 단초가 됐다. 군산 최초 의료선교사인 드루 선교사의 후임으로 알렉산더는 군산에 발을 내딛었다. 1902년 12월, 그의 나이 27세에 군산에 부임했다. 알렉산더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켄터키 목장 재벌 집안의 자손이었다.

군산에서 알렉산더에게 주어진 일은 병약한 환자를 돌보는 일이다. 한 손에 복음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환자를 돌보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고국의 부친의 소천 소식을 듣고 부친의 유업을 승계 해야만 하는 이유 때문에 한국 선교를 포기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 선교사는 궁멀교회에서 만난 불 선교사(한국명 부위렴)의 한국어 통역관이었던 오긍선과 1903년 2월 7일 동반 귀국하게 된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역파송된 의료선교사 오긍선. 그는 ‘거지 아버지’ ‘거지 대장’으로 불리는 1세대 사회사업가였다. 그가 7명의 아이와 함께한 보육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899년 군산으로 부임한 불(Bull) 선교사의 통역을 도왔다. 청년 오긍선은 아버지 오인묵 장로(군산구암교회 초대 장로)와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오 선교사는 알렉산더 도움으로 미국에서 의과대학을 마치게 된다. 한국인 최초의 미남장로교 의료선교사 자격을 획득하고 귀국했다.

오 선교사는 8세부터 한학을 공부해 상경 후, 내부주사를 지냈으나 개화의 물결로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해 협성회·독립협회·만국공동회 등 간부로 활약했다. 일제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하면서도 공주·논산·군산 등지에서 선교사 사역과 개인교사를 하면서 복음구령에 충실했다.

1902년 군산궁멀(현, 구암동)의 선교스테이션의 드루(한국명 유대모) 의료선교사 후임으로 온 알렉산더 의료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유학에 나선 오 선교사는 센트럴대학 교양학부와 켄터키주 루이빌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오 선교사는 1907년 루이빌시립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간 피부과를 전공했고, 같은 해 10월 미국 남장로회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 자격을 얻어 6년 만에 귀국해 전라북도 군산 야소병원장에 취임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료봉사사업을 시작한 오 선교사는 1909년 군산에 영명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직을 맡아 청소년교육에 나선다. 1910년 봄에는 군산을 떠나 광주에서 광주야소교병원장에 취임하고, 1911년에는 목포야소교병원장으로 전임해 목포정명여학교 교장직도 겸임한다. 1912년에는 남장로회 선교부 대표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로 취임하기도 했다. 한국인 교수로는 첫 등용이었다.

오 선교사는 1916년 4월부터 1년간 일본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해 과장 겸 주임교수로 섬기면서 1919년에는 경성보육원을 설립해 고아양육사업을 시작했다. 1934년 2월에는 에비슨교장 후임으로 제2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명예이학박사와 명예법학박사학위도 미국 센트럴대학과 루이빌대학에서 각각 받았다.

오 선교사는 1942년 1월 일제의 압력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보육사업에만 전념했다.

전 위원은 “알렉산더가 군산에서 일하며 오긍선을 만나 아침저녁으로 함께 일하며 그로부터 조선어를 배우면서 한국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오긍선 선교사와 한국에는 커다란 축복이었다”며 “그만큼 오 선교사는 군산 선교부 뿐아니라 호남지역에 보배로운 사람이었다”고 덧붙였다.

임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