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V/교회사람들

초대석/모악제일교회 안양욱 목사

153뉴스 tv 2015. 2. 5. 19:24

 

 

농촌의 젊은이들은 대도시로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연로하신 어르신들 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농촌교회는 존폐의 위기에 있을 정도로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도 구이 모악제일교회의 부흥은 이 지역의 많은 농촌교회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모악제일교회를 설립해 지난 20여년간 섬겨온 안양욱 목사와 성도들의 피와 땀으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찾았다.

 

개척 초기부터 복지사역을 펼쳐온 모악제일교회는 농어촌교회도 자립할 수 있다는 증거를 이 지역의 수많은 교회들에게 보여 주었다. 안양욱 목사는 교회설립 후에 복지선교를 내세우며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교회 부흥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며 전력질주했다.

안 목사는 총회에서 통계적으로 지난해 교회 성장률이 1%도 없다고 발표했지만 모악제일교회는 30배의 부흥을 경험했다아직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교회와 일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그는 꿈과 사랑, 평화를 키워가는 모악엘피스지역아동센터와 구이노인복지센터, 모악제일경로대학 등 복지사역을 펼치면서 교회 부흥을 이루었다. 그가 노인복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게 된 것은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는 한 할머니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하나님의 두드림이었다. 그는 강원도 속초까지 찾아가서 세미나를 들었다. 때로는 교회 집사님과 동행해 세미나에 참석하는 등 노인대학을 개설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당시 상화을 회상했다.

 

 

20054월 문을 연 노인대학에는 40여명이 참석했다. 안 목사는 초급, 중급, 고급 등 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했다. 참석자 대부분 읽기와 쓰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한글을 읽고 쓰는 등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한때 노인대학에 많이 모일 때는 150여명의 인원이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얼마 전에 또 사단법인 사랑나눔 전주·완주지부를 개설했다. 일자리창출과 아버지 교육 등 강화를 위한 또다른 사역의 창구 마련이다. 전문가 등을 초청해 아버지도 요리 등 기본생활이 충족해질 수 있는 평생교육을 위한 자리이다. 특히 대화가 단절된 자녀들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이다. 이와함께 이주여성에 대한 비전도 공유한다.

 

안 목사는 현재 완주군에는 이주여성이 400-5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절반에 가까운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다. 남편의 무능력과 알콜중독에 따른 폭력 등이 주원인이라며 이주여성 일자리창출에도 노력하고 있다. 현재 모악제일교회는 요양사 25명 사회복지사 5명이 공동체 생활을 이뤄가고 있다. 그러나 65세 이상의 여성들이 요양사로 나서고 있다. 이것은 일자리에 대한 기피현상 때문이라고 밝혔다.

 

안 목사는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요양사 교육을 실시해 요양사로 파견한다는 방침이다. 이주여성들의 직업의 질적인 향상을 기대하고 있다. 여기에는 복음사역에 대한 도 하나의 방법이 포함돼 있다.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가지면서 전도한다는 것이 목적이다.

 

 

-. 교회개척은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96년 한일장신대를 졸업과 동시에 그해 교회를 현 위치에서 개척했습니다. 교차로 광고에서 확인 후에 계약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출발했습니다. 구이면 구암리 출신인 제가 사실 교회 개척 후에 지역민들과의 갈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지역 후배가 낫을 들고 교회로 찾아와 악한 행패를 부리는 등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후배가 다시 찾아와 용서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 교회건축을 시작하게 된 사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2011년 지붕 위 보수작업을 하다가 거센 바람으로 인해 3m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이 사고로 나는 발뒷굼치를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아킬레스건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교회건축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군정책으로 조성된 택지를 구입해 건축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건축에 나선 것은 사고를 당하고, 학개서 14-6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기도 가운데 강단에서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성도 모두가 한마음 돼 교회건축을 결의했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550평의 부지를 1억원에 매입했습니다. 교회건축에 따른 작정헌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평신도 시절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맡기고 현금을 통해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 목회동기는.

1년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했습니다. 군대에서도 군종으로 섬기며 목양의 자질을 쌓았습니다. 이때 예배 인도와 설교 등을 통해 내성적 성격에서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화되기도 했습니다. 제대 후에 예수병원에서 근무한지 10년쯤 되던 해에 군목 목사님께서 예수병원을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의 강한 권고가 있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보강교회, 신일교회, 영신교회 등 개척교회에서 목사님들의 동역자로 나서 교회 부흥에 일조했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통한 또다른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당시 45세로 가정과 직장에서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여서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91년 한 주간 휴가를 내 소양시온기도원에서 얍복 강가에서 씨름하던 야곱처럼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희 가정에서 파송예배를 드리고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 평소 추구했던 목회 방침은.

어릴적부터 슈바이처나 페스탈로치 선생님들을 사모했습니다. 그당시 저의 가슴에 각인됐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사회복지를 통한 하나나님 나라 확장이 저의 비전과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목회를 통한 복지의 계획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금끼지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놀랍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앞섭니다.”

 

-. 병원에서 근무하실 때 섭렵한 침술을 가지고 지역민들 대상으로 섬기셨는데.

불교와 유교의 혼합주의가 이 지역에서도 유행하고 있다. 특히 모악산은 증산도의 발원지에다 무속신앙, 구원파, 여호와증인 등의 집결지이다. 나는 왜? 하나님께서 이런 지역에다 교회를 개척하고 지역을 섬기게 하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것이 발에 부딪치는 대상이 사명이라는 음성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동네 어귀에서 놀던 아이들 30여명이 보였습니다. 이 아이들을 교사들과 함께 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10년간 아이들을 대상으로 매일 730분에 학교에 등교시키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섬김은 주일학교 부흥으로 이어졌습니다. 30여명 100%가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아내 김난희 사모의 헌신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목회의 절반은 사모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목회를 통한 복지와 함께 성도들의 협력이 오늘의 모악제일교회로 부흥됐습니다.”

/임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