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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신흥학교 개교 1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북대 명예교수 강봉근 장로가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에 대해 발제 나서

153뉴스 tv 2020. 9. 22. 23:33

 

전주신흥학교 개교 1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제에 나선 전북대 명예교수 강봉근 장로(전주중부교회)가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신사참배 거부와 민족 교육’ 주제로 강의에 나섰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선교·교육·학생운동’ 테마 주제로 20여 명이 각각 발제에 나섰다.

지난 16일 전주중부교회 비전관에서 강봉근 교수를 만나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에 대해 들어봤다. 소년 김창국은 훗날 목회자가 돼 복음의 파수군으로 그 역할을 성실히 감당해내기도 했다.

선교사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었고, 선교의 한 방법으로 학교를 세웠다. 또한 병원도 세웠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종교교육과 예배를 중점으로 신앙교육을 학생들에게 시켰다. 1908년 니스벳 선교사가 설립자 겸 교장으로 취임해 학교이름을 ‘신흥학교’로 바꾸었다. 이는 당시 근대화를 위한 우리민족의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미국 남장로교는 1982년 1월 테이트와 테이트의 동생인 매티 테이트(Miss Mattie Tate, 최마태), 전킨과 전킨의 부인 레이번(Mary Leyburn), 레이놀즈와 레이놀즈의 부인 볼링(Patsy Bolling)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양 등 7명을 초대 한국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들을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라고 부른다. 이들 중 데이비스 양은 1892년 10월 18일 제물포에, 나머지 6인도 11월 3일에 제물포에 도착함으로써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됐다.

1897년 7월17일 레이놀즈 목사의 설교와 집례로 5명의 신자가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김창국, 김내윤(테이트의 사환), 유성안(柳聖安) 씨의 부인 김성희씨, 김제원(金濟元) 씨의 부인인 진주 강씨(김창국의 모친), 함성칠 씨의 부인 되는 임씨였다. 이로써 ‘전주교회(교회 명칭)’가 한국인 세례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창립됐다.

-. 레이놀즈 목사의 사랑채에서 한 소년을 대상으로 하여 근대식 교육이 시작됐고, 이것이 전주에서 시작된 최초의 근대교육이요, 신흥학교의 출발이 됐다는데.

“호남 최초의 세례 교인 김성희와 김창국 또한 김창국의 조모와 모친은 테이트 양의 전도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전주 최초의 신자들이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훈련시킬 필요성을 느껴 성경학교를 열었는데, 이 성경학교는 1899년에 14명의 남자들이 입학하며 시작됐다. 성경학교를 열었던 이듬해인 1900년 9월 9일 서문밖 완산 북림 기슭에 있는 레이놀즈 목사의 사랑채에서 한 소년을 대상으로 하여 근대식 교육이 시작됐고, 이것이 전주에서 시작된 최초의 근대교육이요, 신흥학교의 출발이다. 이 최초의 근대식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당시 만 16세의 소년인 김창국(金昶國)이었다. 김창국은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이자 최초의 신흥인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그의 조모와 모친은 호남 최초의 신자들이기도 하다.”

-. 김창국의 소년시절과 교육과정은.

“김창국(金昶國) 목사는 1884년 1월 28일 전주에서 한의원인 김제원(金濟元)씨의 二男으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는 9년간 사숙(私塾)에서 한문공부를 했다. 그의 조모와 모친이 선교사 테이트양의 전도로 전주 최초의 신자가 됐고, 김창국도 일찍부터 기독교 교인이 됐다.

그는 당시 선교사인 테이트 목사의 사동(使童)으로 일하며, 주일에는 해리슨 목사와 레이놀즈 목사 등을 도우며, 주일학교를 섬겼다. 또, 선교사들을 도와 장터 시장에 나가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등 전도활동에도 힘썼다. 이때 그의 나이 만 13세였으며, 1900년 9월 9일에는 레이놀즈의 사랑방에서 전주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해리슨 목사의 부인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그후 그는 해리슨 부인의 주선으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1907년에 졸업했다.

그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평양 신학교에 진학해 1915년에 졸업한다. 호남 지방 최초의 신학교 졸업생이 됐으며, 그해 목사가 됐다. 그는 목사가 되기 이전에 군산에 있는 영명학교(永明學校)에 3년간 근무 한 적이 있으며, 금산(金山)에 있는 심광학교(心光學校)에서도 3년 동안 근무했다. 기전학교에 졸업생이며,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인 임영신(任永信)여사는 심광학교 재직 중에 가르친 제자이다.

-. 목회활동은.

“김창국은 1910년부터 전북 익산시에서 4년간 전도사로 시무했으며, 1915년 목사가 된 후에도 익산시에서 네 교회를 맡아 2년간 섬겼다. 1917년 제주도로 파송돼 6년동안 제주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고, 제주 내도리교회(濟州內都里敎會), 삼양리교회(三陽里敎會)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후 1922년에는 광주 남문밖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하다가 1924년 광주 양림교회(楊林敎會)를 창립해 25년동안 이 교회에서 섬겼다.

-. 가족관계는.

“김창국 목사는 광주의 초대 YWCA회장을 역임한 부인 양응도 여사와의 사이에 6남매(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김현정(金顯晶)씨는 평양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서 일생을 마쳤고, 차남 김현승(金顯承)씨는 숭전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시인으로도 유명한 분이다. 3남 김현택(金顯擇)씨는 신흥학교 지정 2회 졸업생으로 전북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4남인 김현구(金顯求)씨는 전남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았으며, 광주 중앙교회의 원로장로이다.”

-. 신흥인 최초 김창국 목사의 생애에 대해 살펴보았다. 역사적 의미는.

“전주 땅에 개화의 물결과 함께 기독교가 들어오고, 그 복음의 씨앗이 교육이라는 토양 위에 심어져 수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어찌 김창국 소년 한 사람뿐이겠는가? 우히 신흥의 120년 역사 속에는 수많은 김창국이 있었고, 그들이 이 땅에 하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과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일 등 내 이웃들을 섬기며 헌신해왔다는 것이다.”

임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