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기독신문TV/교계뉴스

익산4.4만세운동 감사기념예배 및 기념식

153뉴스 tv 2019. 4. 2. 16:39









익산4.4만세운동 제100주년 기념예배 및 기념식이 지난 3월 31일 오후 3시 익산남전교회(담임 김연태 목사)에서 열렸다.

기장 익산노회 산하 익산4.4만세운동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전영철 목사) 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100주년을 맞이하는 익산4.4만세운동’(수1:6) 주제로 전주대 명예교수 주명준 장로(홍산교회)가 말씀을 전했다.

주명준 명예교수는 이날 강의에서 ‘남전교회의 설립과 1910년 대의 주변 상황’, ‘천도교 측의 만세운동’, ‘문용기 열사의 귀향’, ‘익산4.4만세운동의 주동자’, ‘4월 4일 솜리장터의 대한독립만세’ 등 익산4.4만세운동의 태동과 전개에 대해 밝혔다.

주 명예교수는 4.4만세운동을 전개하면서 “4월 4일 금요일, 하얀 한복으로 차려입은 성도들이 교회 마당에 속속 모여들었다. 교인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에게도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며 “문용기 열사는 박영문 열사에게 도남학교 학생들을 동원하고, 최월봉(최대위) 열사에게 최대진 목사님을 대신해 성도들을 이끌도록 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150여명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그당시 남전교회는 목사 1명, 장로 3명, 주일학교어린이 140명, 세례교인 80명 등 총 200명이었다.

주 명예교수는 또, “정오에 독린선포식을 갖기로 했다. 남전교회 성도들은 하얗게 논둑길 들녘을 가로질러 동구 밖으로 빠져가고 있었다. 그때, 그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았던 한 아낙네는, 뭉게구름이 들녘을 하얗게 뒤덮으며 흐르는 듯, 떠나가는 듯 시야에서 사라지더라고 중언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와함께 주 교수는 “남전교회는 이미 고현교회 오덕근 장로와 성도들, 서두교회의 박병렬과 박공업 성도들, 황등교회의 백낙규, 천도교 신자들과 연락을 취해 솜리시장에 모였다”며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이 자리에는 고현, 황등, 함라, 웅포, 선리, 널문이, 여산, 신동교회의 성도들이 참가했다고 사람들은 증언한다”고 덧붙였다.

주 교수는 “김치옥 열사와 뭉용기 열사의 잔 심부름을 하던 서울 중동학교 재학생 김종현과 김철환, 이시웅 등도 동참했다. 3월 4일 군산시위를 촉발시킨 세브란스 의전학생 김병수와 도남학교 김영인 선생, 황등동련교회의 계동학교, 고현교회 경신여숙, 춘포와 웅포 지역민립학교의 학생들 수백명이 참가했다”고 했다.

특히 남전교회 사찰집사 아들인 9세의 정군덕도 참여했다. 정군덕은 이후 남전교회 장로가 돼 1980년까지 생존하면서 당시 겪었던 감동적인 상황들을 생생하게 증언하기도 했다.

이날 문용기 열사, 박영문 열사, 신덕리의 장경춘 성도 등 남전교회 3명이 순국했다. 춘포면 덕실에 살던 박도현 성도, 익산 서정만 열사, 황화면에 이충규 열사 등 대멸의 선두에서 군중을 이끌던 열사들이 차례로 일본인들의 총칼에 순국을 당했다.

주명준 명예교수를 만나 익산4.4만세운동 태동과 전개 상황 등에 대해 들어본다.

-. 남전교회의 설립과 1910년대의 주변 상황은.

“전킨 선교사님이 군산에 도착해 선교를 시작하면서 두 번째 설립한 교회가 바로 익산 남전교회이다. ‘장로회 사기’에는 익산군의 남차문교회라고 기록돼 있다. 1901년 전킨 선교사에 의해 이선국과 이성춘, 박성윤, 이성일 등이 개종하게 된다. 이후 당시 성도들이 많아져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설립한다. 1917년 최대진 목사님이 담임으로 부임한 이후 남전교회 성도들 수는 20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 세례교인은 80여명이었다. 남전교회의 당시 교세는 군산의 개복동교회(363명), 옥구군 구암교회(350명)에 이어 세 번째로 성도들이 많았다. 남전교회는 도남학교와 미성여학교롤 설립해 인재양성에도 일조했다. 이는 선교사들의 기독교 선교활동을 접하게 돼 외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들이고, 신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세계 정세를 읽는 상황도 갖게 된다. 그러나 1910년 대한민국은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오산면은 일대는 옥구와 익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고, 일제의 수탈이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었다. 남전교회 성도들도 일제의 수탈의 한 가운데 서 있었고, 강한 정신력을 갖게 됐다. 때마침 1919년 3월 1일, ‘조선독립’을 외최는 만세운동이 서울에서부터 전국으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전북지역에서는 3월 5일 군산, 3월 13일 전주에서의 시위가 각지에 전개됐다. 만세운동을 일으킨 주류는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이었다. 남전교회 성도들도 전킨 선교사의 신앙교육에 의해 세계정세를 익히며 삶과 신앙에 매진하고 있던 시기에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다. 1899년 5월 1일부터 군산항에 자주 모습을 나타내던 일본일들은 결국 조선을 집어 삼키고 만다. 일본인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워 토지수탈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남전리에는 ‘동척’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면, 남전리에도 일본의 동척회사 소유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03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이미 옥구꾸뜰에 진전상치라는 사람은 3,000정보가 넘는 토지를 소유하면서 9월에 진전농장(오산면 학곤리 소재, 현 송학리)을 설립한다. 또, 1904년 6월에는 불이흥업주식회사는 등본농장(오산면 오산리 소재, 이후 전북농장으로 개명)을 설립한다.”

-. 문용기 열사에 대해.

“문용기 열사는 현 오산면 오산리 310번제 관음 마을에서 태어난다. 호적상의 이름은 문용기 이며, 집안에서는 정관으로 불렀다. 마을 서당에서 훈장을 지내던 문용기 열사는 남전교회에서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가운데 24세 때에,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서당에서 훈장을 하던 경력이 인정돼 영명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친다. 이후 문 열사는 30세인 1098년에 목포의 짠 왓킨스중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남장로교회 목포 선교부에서 설립한 학교이고, 나중에 영흥학교로 개명된다. 이 학교에서도 학생 신분과 함께 한문 교사직을 병행하게 된다. 문 열사가 독립운동에 열정을 갖게 된 동기는 이승만 전대통령과의 만남이 계기가 된다. 서울 YMCA 총무 이승만 전대통령이 전구을 순회하며 강연활동을 가지던 시기에 목포를 방문한 이승만 전대통령과의 만남을 갖는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숙식을 함께하며 조국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대화를 갖는 등 목포의 한 극장에서 주강사로 이승만 전대통령이, 찬조연사로 문용기 열사가 강연도 가진다. 이때 문 열사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주제로 찬조연설에 나서 많은 청주에게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 익산4.4만세운동의 주동자가 또 있다는데.

“김치옥 열사와 박성엽 열사이다. 93년 동안 잊혀진 인물이다. 익산4.4만세운동을 기획하고 독립선언서를 현장에서 낭독한 사람이 김치옥 열사이며, 군산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서 문용기 열사와 함께 연단에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흔들며 만세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박성엽 열사이다. 이 두 사람도 남전교회를 섬긴 집사이다. 김치옥 열사는 동생 김기옥과 함께 주일학교 교사로도 섬겼다. 그는 구암교회에 출석하던 지인 임종우 집사를 통해 익산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김 열사는 먼저 박성엽 집사를 설득해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박성엽 집사는 남전교회 창립멤버이며, 박성엽 집사의 친형인 박성윤성도가 남전교회 장로이었기에 설득작업에 나선게 됐다. 박성엽 집사는 궁말의 선교부에서 해리슨 선교사를 도우며 있었기에 3.1운동과 3.5운동 등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에 김 열사는 박성엽 집사를 설득하게 된다. 박성엽 집사는 군산 선교부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서 집에 보관하고 있었기에 순조롭게 진행됐다. 김치오 열사와 박성엽 집사는 교인들을, 문용기 열사는 박영문 열사와 도남학교 학생들을 설득한다. 이때 남전교회 박다연 집사도 적극적으로 동참에 나서 본인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장소로 사용한다. 또, 교회 청년인 장경춘과 장만준, 전창여 등도 적극 동참한다.”

임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