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영 기자의 초대석/
"농어촌교회의 희망 전도사 김제희망교회 서대운 목사"
“교회의 부흥은 수가 아니며 복음의 회복입니다.”
김제희망교회(구,연포교회) 서대운 목사가 작은 교회와 나누고 싶은 희망이야기 ‘농어촌교회의 희망’(터치전도코리아) 서적을 출간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서대운 목사는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나님의 은혜였다”며 “그 절망의 골짜기가 아니었다면 회복의 역사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잊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대운 목사는 “고통을 통해 2,000년전 십자가의 복음이 자신의 실제로 다가왔으며, 예수님과 하나됨을 체험하게 됐다”며 “그 갈등과 환란이 오늘의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메신저가 됐다”고 밝혔다.
서 목사는 지난 2010년 12월 24일에 김제희망교회 담임으로 부임한다. 그러나 낡고 허술한 교회당과 주변환경은 절망 그 자체였다. 역류한 물로 넘쳐나는 예배당 , 수세식 화장실,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예배당 등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여기에다 1년 재정 예산이 1,000천만원 미만에 그치는 등 일명 ‘빈집’ 형태인 페쇄 직전의 교회였다.
서 목사는 부임후 평균 연령 67세 이상 18명의 ‘흰머리 소녀들’(여자성도)에게 복음의 회복과 희망을 전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케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서 목사는 교회와 마을 주민들을 향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섬김의 본을 펼쳤다.
서 목사는 오랜세월 부정적 사고와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흰머리 소녀들’의 사고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제자양육에 나섰다. 성경공부를 통해 복음의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의 만남과 전도와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전하기 시작했다. ‘흰머리소녀들’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상유지의 신앙과 교회사수에 머물었던 이들이 서 목사의 비전을 공유했다.
서 목사는 “동네를 순회하면서 김치나 된장, 고추장에 식사를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을 발견했다.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는 어르신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반찬사역에 전념하게 됐다”고 반찬사역 동기를 설명했다.
서 목사의 섬김에 대해 반신반의 하던 동네 주민들도 점차적으로 변화가 나타났다. 반찬사역도 현재는 발전을 거듭 맞춤형 반찬사역을 다져가고 있다. 논밭을 찾아 동네 어르신들의 일터에서 그들이 필요를 채워가며 섬긴 세월은 마을전체가 회복의 역사가 뒤따랐다.
서 목사는 “성도들의 복음의 회복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목회자 뿐 아니라 성도들도 복음의 능력 체험하면 달라진다”며 “지역을 향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교회의 가치가 상실된다. 내 가정과 이웃을 향해 복음을 외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희망교회는 연탄나르기, 호떡전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섬김을 통해 관계전도를 실시하고 있다.
특히 재능기부 섬김은 불신자 전도에 다이나마트의 역할을 했다. 연포마을에는 150가구 230여명의 마을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2011년 6월 의료봉사활동을 광주기독병원신우회 회원들40명을 초청해 ‘153전도초청잔치’를 가졌다. 이 재능기부 섬김을 통해 마을주민들이 교회와 목회자를 대하는 시선도 변하기 시작했다.
또 3개월 전에 가진 ‘24주년교회설립기념’ 행사일환으로 마련한 지역민 초청생일잔치도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160명의 어르신들을 초청해 가진 이날 섬김의 시간도 전도에 유익한 시간이 됐다. 이날 행사에는 죽산면 면장, 조합장, 자치위원장 등도 참여했다.
2020년까지 333 비전을 세우고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서대운 목사의 신앙과 비전 등에 들어봤다.
-. 2020 비전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2020 비전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2020년까지 333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3명의 단독선교사 파송과 30명 선교사 후원, 300명 기도용사와 함께 복음사역에 정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현재 남양주 예수생명교회와 공동으로 네팔에 선교사를 파송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선교헌금을 지속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전도와 선교 그리고 기도입니다.”
-. 153전도운동은.
“6개월간 성도 한명이 5명을 전도해 3회 이상 교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운동을 실시해 재적교인 100여명이 넘었습니다. 출석교인도 7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등록은 3회 이상 교회에 출석해야 등록교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저의 고향은 전남 영암군 삼호면 용당리입니다. 본격적인 교회출석은 주일학교 4학년 성탄절 무렵이었습니다. 성탄절 연습이 있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교회를 찾았다가 이은희 선생님(현재 목회자)의 권유로 성극연습을 가졌습니다. 이은희 선생님은 항상 저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목자3의 역할은 대사가 없는 역할이었지만 선생님과 성도들은 그런 저에게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이른아침 어린이주일예배시간에 앞서 이은희 선생님은 저희 가정을 방문해 옷을 입혀주는 등 정성을 다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기는.
“대입시험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를 6개월여동안 하면서 곤고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손바닥보다 작은 분신처럼 여기던 작은 라디오 하나가 있었습니다. 새벽녘에 일어나 채널을 돌리다가 아세아 극동방송(1566khz)에서 흘러나오는 찬송을 듣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돌아와 돌아와 집을 나간 자여..’ 찬송의 가사 노랫말은 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찬송이 마치고 누가복음 15장을 본문으로 어느 목사님께서 ‘탕자의 비유’에 대한 설교를 이어가셨습니다. 6개월간의 방황을 끝내고 아버지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이후에도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격려해 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대학진학후 CCC에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계기는.
“대학진학후 캠퍼스의 낭만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인데다 삶의 회의가 찾아와 자살충동도 가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스쿨버스를 타고 귀가하다가 CCC사영리에 대해 듣게 됐습니다. 앞 자석에서 최영란 간사의 인도로 사영리에 대해 고백을 하던 그의 고백이 들려왔습니다. 4원리 영접기도를 저도 그들과 함께 고백하게 됐습니다. 그순간 지난 삶의 모든 장면들이 필름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이후에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됐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CCC목포지부에서 순장으로, 캠퍼스 대표 순장 등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목회 활동은.
“10년전에 성도교회 교유전도사로 부임해 250여명의 아이들을 출석시키는 경험을 했습니다. 30여명의 아이들이 지하예배실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비전 003/200 작전’을 세웠습니다. 2003년까지 200여명의 주일학교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새소식반 개설과 어린이초청잔치 등을 펼쳐 3년후 28명의 어린이들이 250명이 출석하는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 전도를 위해 저는 오렌지색으로 머리염색도 가졌습니다. 대학원 동기생들과 교수님들의 핀잔도 받았지만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때 함께 기도하며 동역했던 교사들이 지금의 희망교회를 섬기는 기드온 300명의 용사가 돼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추억은 장년 350명 출석교회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단기선교를 다녀왔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항공료가 1억여원에 이르렀습니다.”
-. 사역을 감당하면서 힘들었던 부문은.
“저의 자녀가 4남매입니다. 유치부 막내부터 큰아이가 중학생입니다. 전남영광에 소재한 영광대교회 수석부목으로 섬기면서 성실한 목회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110년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입니다. 성공목회를 지향하며 달려가던 중요한 시기에 아내와의 심한 갈등 가운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4남매를 양육하며 하루종일 시달리고 힘들어하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아내의 질고로 인해 그 교회를 사임하고, 우역곡절 끝에 희망교회 담임으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아내의 심한 우울증으로 사역에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지금은 회복돼 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고난이 저 뿐아니라 가족들 모두에게 축복의 기회가 됐습니다. 이제 다시는 주님보다 앞서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목양과 함께 가정을 섬기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 터치전도코리아와의 만남은.
“부임후 6개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배가의 회복과 함께 좀더 구체적인 전도방법을 찾다가 ‘터치전도부흥프로젝트’ 신문광고를 보게 됐습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해 많은 도전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희머리소녀’ 성도들에게도 이 세미나에 참석시켜 도전을 제시했습니다. 연말에 3배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 간증을 전주성결교회, 부산포도원교회 등 초청으로 전하는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초심을 잊지않고 한 영혼의 소중함을 가슴에 새기며 복음을 위해 달려가겠습니다.”
/임채영 기자
"농어촌교회의 희망 전도사 김제희망교회 서대운 목사"
“교회의 부흥은 수가 아니며 복음의 회복입니다.”
김제희망교회(구,연포교회) 서대운 목사가 작은 교회와 나누고 싶은 희망이야기 ‘농어촌교회의 희망’(터치전도코리아) 서적을 출간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서대운 목사는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나님의 은혜였다”며 “그 절망의 골짜기가 아니었다면 회복의 역사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잊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대운 목사는 “고통을 통해 2,000년전 십자가의 복음이 자신의 실제로 다가왔으며, 예수님과 하나됨을 체험하게 됐다”며 “그 갈등과 환란이 오늘의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메신저가 됐다”고 밝혔다.
서 목사는 지난 2010년 12월 24일에 김제희망교회 담임으로 부임한다. 그러나 낡고 허술한 교회당과 주변환경은 절망 그 자체였다. 역류한 물로 넘쳐나는 예배당 , 수세식 화장실,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예배당 등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여기에다 1년 재정 예산이 1,000천만원 미만에 그치는 등 일명 ‘빈집’ 형태인 페쇄 직전의 교회였다.
서 목사는 부임후 평균 연령 67세 이상 18명의 ‘흰머리 소녀들’(여자성도)에게 복음의 회복과 희망을 전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케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서 목사는 교회와 마을 주민들을 향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섬김의 본을 펼쳤다.
서 목사는 오랜세월 부정적 사고와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흰머리 소녀들’의 사고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제자양육에 나섰다. 성경공부를 통해 복음의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의 만남과 전도와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전하기 시작했다. ‘흰머리소녀들’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상유지의 신앙과 교회사수에 머물었던 이들이 서 목사의 비전을 공유했다.
서 목사는 “동네를 순회하면서 김치나 된장, 고추장에 식사를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을 발견했다.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는 어르신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반찬사역에 전념하게 됐다”고 반찬사역 동기를 설명했다.
서 목사의 섬김에 대해 반신반의 하던 동네 주민들도 점차적으로 변화가 나타났다. 반찬사역도 현재는 발전을 거듭 맞춤형 반찬사역을 다져가고 있다. 논밭을 찾아 동네 어르신들의 일터에서 그들이 필요를 채워가며 섬긴 세월은 마을전체가 회복의 역사가 뒤따랐다.
서 목사는 “성도들의 복음의 회복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목회자 뿐 아니라 성도들도 복음의 능력 체험하면 달라진다”며 “지역을 향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교회의 가치가 상실된다. 내 가정과 이웃을 향해 복음을 외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희망교회는 연탄나르기, 호떡전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섬김을 통해 관계전도를 실시하고 있다.
특히 재능기부 섬김은 불신자 전도에 다이나마트의 역할을 했다. 연포마을에는 150가구 230여명의 마을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2011년 6월 의료봉사활동을 광주기독병원신우회 회원들40명을 초청해 ‘153전도초청잔치’를 가졌다. 이 재능기부 섬김을 통해 마을주민들이 교회와 목회자를 대하는 시선도 변하기 시작했다.
또 3개월 전에 가진 ‘24주년교회설립기념’ 행사일환으로 마련한 지역민 초청생일잔치도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160명의 어르신들을 초청해 가진 이날 섬김의 시간도 전도에 유익한 시간이 됐다. 이날 행사에는 죽산면 면장, 조합장, 자치위원장 등도 참여했다.
2020년까지 333 비전을 세우고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서대운 목사의 신앙과 비전 등에 들어봤다.
-. 2020 비전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2020 비전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2020년까지 333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3명의 단독선교사 파송과 30명 선교사 후원, 300명 기도용사와 함께 복음사역에 정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현재 남양주 예수생명교회와 공동으로 네팔에 선교사를 파송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선교헌금을 지속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전도와 선교 그리고 기도입니다.”
-. 153전도운동은.
“6개월간 성도 한명이 5명을 전도해 3회 이상 교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운동을 실시해 재적교인 100여명이 넘었습니다. 출석교인도 7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등록은 3회 이상 교회에 출석해야 등록교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저의 고향은 전남 영암군 삼호면 용당리입니다. 본격적인 교회출석은 주일학교 4학년 성탄절 무렵이었습니다. 성탄절 연습이 있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교회를 찾았다가 이은희 선생님(현재 목회자)의 권유로 성극연습을 가졌습니다. 이은희 선생님은 항상 저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목자3의 역할은 대사가 없는 역할이었지만 선생님과 성도들은 그런 저에게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이른아침 어린이주일예배시간에 앞서 이은희 선생님은 저희 가정을 방문해 옷을 입혀주는 등 정성을 다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기는.
“대입시험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를 6개월여동안 하면서 곤고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손바닥보다 작은 분신처럼 여기던 작은 라디오 하나가 있었습니다. 새벽녘에 일어나 채널을 돌리다가 아세아 극동방송(1566khz)에서 흘러나오는 찬송을 듣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돌아와 돌아와 집을 나간 자여..’ 찬송의 가사 노랫말은 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찬송이 마치고 누가복음 15장을 본문으로 어느 목사님께서 ‘탕자의 비유’에 대한 설교를 이어가셨습니다. 6개월간의 방황을 끝내고 아버지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이후에도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격려해 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대학진학후 CCC에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계기는.
“대학진학후 캠퍼스의 낭만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인데다 삶의 회의가 찾아와 자살충동도 가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스쿨버스를 타고 귀가하다가 CCC사영리에 대해 듣게 됐습니다. 앞 자석에서 최영란 간사의 인도로 사영리에 대해 고백을 하던 그의 고백이 들려왔습니다. 4원리 영접기도를 저도 그들과 함께 고백하게 됐습니다. 그순간 지난 삶의 모든 장면들이 필름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이후에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됐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CCC목포지부에서 순장으로, 캠퍼스 대표 순장 등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목회 활동은.
“10년전에 성도교회 교유전도사로 부임해 250여명의 아이들을 출석시키는 경험을 했습니다. 30여명의 아이들이 지하예배실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비전 003/200 작전’을 세웠습니다. 2003년까지 200여명의 주일학교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새소식반 개설과 어린이초청잔치 등을 펼쳐 3년후 28명의 어린이들이 250명이 출석하는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 전도를 위해 저는 오렌지색으로 머리염색도 가졌습니다. 대학원 동기생들과 교수님들의 핀잔도 받았지만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때 함께 기도하며 동역했던 교사들이 지금의 희망교회를 섬기는 기드온 300명의 용사가 돼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추억은 장년 350명 출석교회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단기선교를 다녀왔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항공료가 1억여원에 이르렀습니다.”
-. 사역을 감당하면서 힘들었던 부문은.
“저의 자녀가 4남매입니다. 유치부 막내부터 큰아이가 중학생입니다. 전남영광에 소재한 영광대교회 수석부목으로 섬기면서 성실한 목회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110년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입니다. 성공목회를 지향하며 달려가던 중요한 시기에 아내와의 심한 갈등 가운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4남매를 양육하며 하루종일 시달리고 힘들어하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아내의 질고로 인해 그 교회를 사임하고, 우역곡절 끝에 희망교회 담임으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아내의 심한 우울증으로 사역에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지금은 회복돼 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고난이 저 뿐아니라 가족들 모두에게 축복의 기회가 됐습니다. 이제 다시는 주님보다 앞서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목양과 함께 가정을 섬기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 터치전도코리아와의 만남은.
“부임후 6개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배가의 회복과 함께 좀더 구체적인 전도방법을 찾다가 ‘터치전도부흥프로젝트’ 신문광고를 보게 됐습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해 많은 도전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희머리소녀’ 성도들에게도 이 세미나에 참석시켜 도전을 제시했습니다. 연말에 3배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 간증을 전주성결교회, 부산포도원교회 등 초청으로 전하는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초심을 잊지않고 한 영혼의 소중함을 가슴에 새기며 복음을 위해 달려가겠습니다.”
/임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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