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사랑의 원자탄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목사의 흔적

153뉴스 tv 2007. 3. 14. 06:01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목사의 흔적

"나는 예수 중독자가 되어야 하겠다"


*한센 환자의 고름을 입으로 치료하고 있는 손양원목사

              *손양원목사

여수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애양원은 한국교회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손양원목사의 신앙과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필자가 애양원을 처음 방문하게 된 것은 지난 1983년 여느 겨울이었다. 그때 지인들과 함께 처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여수 시내에서 버스와 열차를 타고 매주 1회 양로원에 거주하고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 뵙고 섬기며 사랑을 나눴던 순간순간의 영상은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신앙의 시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필자는 당시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처녀 방문을 하여 한쎈 병을 앓고 있는 그들을 대면한 필자는 놀라움과 경이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밝고 환한 모습과 애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중보기도 하시는 모습에 마음 깊은 한 곳에서 진한 눈물이 고여옴을 느껴오곤 했다.

 
*성도들과 함께한 손애원목사(앞줄 좌측 2번째)

“하나님께서 많은 선한 이들을 제쳐두고 이 죄 많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그 자비하신 손길을 뻗치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넉넉히 눈물겹고 또 눈물겨운 것이라오.”며 고백하시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나누며 섬기고 사랑으로 교제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는 이 땅에서 육신의 질고로 온갖 수난과  더불어 부끄럽기 그지없는 그들의 지난 삶이었지만, 지금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그 삶 위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만큼은 숨길 수가 없어 세상 모든 이에게 큰소리로 외치리라는 진솔하고 참된 고백이 되도록 소망을 품어본다.


 
               *애양원 역사관
 
애양원 태동
애양원 병원은 1909년 ‘포사이트’선교사가 의사 오웬씨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광주로 오는 도중 길가에 쓰려져 있는 한센병 여자환자를 돌봐준 것이 계기로 설립됐다. 이 한센병 여자 환자는 그해 3월에 부임해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윌슨(Robert M. Wilson)과 몇몇 선교사들에 의해 치료를 받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의학으로 ‘한센병’을 치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광주 제중원장직을 맡고 있던 윌슨 선교사는 자신의 사택건축을 위해 벽돌을 굽던 가마터에 당시만 해도 천형(天刑)으로 알려진  한센병 환자 10여명을 수용, 치료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건달로 불렸던 최흥종씨는 윌슨 등 몇몇 선교사들이 소외받고 있던 한센병 환자의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게 되고, 그가 광주 봉선동에 약 1,000평의 부지를 기증하면서 애양원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한센병원인 광주나병원이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환자들로 병원이 좁아지자 1928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8번지로 이전했으며 당시 나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한센 병자 600여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됐다. 이후 1936년 광주 나병원을 '여수 애양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오늘날의 ‘애양원 시대’를 열게 됐던 것이다.

 
             *손양원목사 목회철학
 
손양원목사의 출생과 성장배경

‘사랑의 성자’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는 1902년 경남 함안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8년 장로였던 부친을 따라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고향에 있던 칠원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그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며 단호히 거절했으며 이로인해 결국 퇴학 처분을 받게 됐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쓰가모 중학교 야간부를 다녔는데, 동양선교회의 활동에 큰 감동을 받고 귀국해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그곳에서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성경학교 강사로 나오던 주기철 목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가르침에 크게 감동을 받아 주 목사를 스승으로 섬기게 된다.

 
  *피난선(당시 손양원목사는 피난을 거부하고 성도들과 함께하다가 순교했다)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1925년 성경학교를 졸업한 그는 첫 임지가 부산 나병원교회 전도사였다. 그가 나병원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부산 나병치료소인 ‘상애원’에 기거하던 나권사라는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고 나서 그를 ‘상애원’에 와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한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는 신학을 깊이 배우기 위해 1935년부터 3년 동안 평양신학대에서 공부를 했으며, 졸업하고 나서 여수의 애양원 교회에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일제치하 때 신사참배의 강요가 기독교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손양원 목사가 소속한 교단에서 신사참배를 참여하게 됐는데 그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라며 단호히 참배를 거부했다. 그는 1940년 9월 수감돼 온갖 핍박과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6년여 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과거 목회를 하던 애양원 교회로 돌아 왔다. 하지만 평온한 삶도 잠시 뿐, 그와 그의 가정에 피해 갈 수 없는 시련이 다가왔다.

 
                     *온 가족 한 자리에(뒷쪽 학생은 양아들 안재선의 모습)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순천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첫 아들 동인과 둘째 아들 동신이 공산당을 추종하던 급우 안재선을 비롯한 동료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반란이 진압되고 자신의 아들들을 죽였던 안재선을 만나게 됐는데, 그는 자신의 원수를 양아들로 입양했다.


1950년에 6.25 사변이 터져 부산을 제외한 남한 전체에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갔고  여수 애양원에까지 공산군들이 들이닥쳤다. 그는 120여명의 목사들과 함께 체포돼 여수 감옥에 감금됐다가 그해 9월 28일 밤 미평의 과수원에서 공산당의 손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순교비
 
애양원 교회의 앞뜰에는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기도로 호흡을 삼고 성경으로 양식을 삼고, 복음전도로 생활을 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고, 원수에게도 사랑의 사도로, 고난을 받는 개인과 민족에게는 소망을 주는 삶을 살았던” 손목사의 목회철학과 순교신앙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가슴이 냉랭해진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 신앙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심비에 새겨야 할 내용이다.

  *손양원목사와 정양순사모 묘지(뒤쪽)와 동신, 동인의 묘지(앞쪽)
 
애양원 교회에서 언덕을 내려가면 바닷가 양지 바른 곳에 세 개의 묘지를 볼 수가 있다. 그곳에는 손양원목사와 1977년 소천하신 사모님이 합장되어 있는 것이고 아래의 두 개는 6.25전쟁시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한 두 아들(동신 동인)의 묘지이다. 손양원목사의 위대한 신앙은 1948년에 공산당에게 두 아들을 잃고서도 그 원수를 사형직전 구해내서 양자를 삼은 것은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1994년 준공된 순교기념관(매년 4만명의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1994년 준공된 순교기념관은 1989년 안용준 목사가 소장하고 있던 손양원목사의 150점의 유물로 시작을 하였는데, 연간 4만여명이 찾고 있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손양원목사의  귀중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국기에 대한 경례를 옛날에는 머리를 숙여 절하던 것을 손양원목사가 이승만대통령을 면담한 자리에서 이것은 십계명의 1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며 설득하여 가슴에 손을 얻는 것으로 바꾼 일화가 담긴 눈에 띄는 사진이 있다.


천형을 앓고 있던 한센병 환자들과 더불어 살았으며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친구를 양아들로 삼아 사랑을 베풀었던 손양원 목사는 온몸을 희생하면서 기독교의 사랑을 묵묵히 실천한  목회자로써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어두워 가는 세상에서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할 필요를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목사님의 일사각오의 순교신앙은 우리에게 보이기 위한 주님의 각별한 섭리임을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