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사랑의 원자탄

손양원목사의 신앙사적 의의

153뉴스 tv 2007. 3. 13. 06:10

 

 

 일찍이 한명동 목사는 손양원목사를 가르켜 "20세기가 낳은 한국교회의 거성입니다.그는 그 존재 자체로 남에게 은혜를 주는 언제나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사람이었습니다"고 했다.
 과연 손양원목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성자요,목회자요,순교자였다.손양원목사의 전기를 쓴 안용준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이란 표현으로 손목사의 감화력을 표현하였다.원자탄 같은 그런 폭발력으로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감화를 끼친 그의 생이 주는 역사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손양원목사의 생애와 목회가 남긴 공헌을 간추려 교회사적 의의를 새겨보고저 한다.


 

 


 1.손양원목사는 모범적인 전도자였다.

 그는 1926년 3월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한 이후 부산 감만동 교회의 외지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한 이래 1932년,34년 2년간 남부민 교회를 시무한 기간을 제하고 줄곳 외지 전도사로 1939년 애양원교회에 부임할 때까지 개척 전도에 전념하였다.그가 개척한 교회는 밀양수산,울산벙어진,울산남창,부산 남부민,양산원동교회 등이었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시찰회에서 순회 전도비를 지불하기를 거절하였음에도 양산 김해 함안지역을 다니며 전도에 힘썼다.
 그의 전도는 옥중에서도 그칠줄 몰랐기 때문에 결국 독방으로 옮겨지기까지 하였다.검찰조서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일본 천황폐하를 신으로 받아드리지 않으며 신사 참배를 거절하는 이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만이 유일신이며 예수님만이 속죄주인 사실을 전하는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물론 그런 전도가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한 재판 결과가 내려질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보다 심문하는 검사를 향한 전도에 힘쓰므로 복음전파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마치 아그립바왕이나,베스도,벨릭스총독의 재판장에 선 바울의 변증자세와 같은 전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그는 사형자에 끌려가는 도중에도 전도함으로 사형직전까지 전도한 토마스 선교사를 연상시켰다.


 

 


 2.참목자상을 보여준 목회자였다.

 애양원교회를 시무하면서 양떼들을 위하여 설교한 메시지는 철저한 성경중심적인 "말씀"의 사자였다.그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설교란 강도학원리 꼭 '성경말씀에만 터를 닦고'라고 한 대로 66권이 본문이요,제목이요,대지도 소지도 이를 기초로 합니다.성경에서 성경을 전부로 삼고 성경으로,성경을 풀고 싶습니다".성경에 묻고 성경에서 대답하고 싶습니다.서론도 성경이요,결론도 성경이되고자 합니다.즉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마치고 싶습니다.그래서 십자가의 대도와 기독교의 교리를 분명히 전하고 싶습니다"(이광일저,손양원목사의 생애와 사상,PP.143-144)

 손목사는 이렇게 말씀중심으로 양육하는데 모범을 보일 뿐 아니라 육적으로 어렵고 외로운 양떼들을 돌아보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참목자상을 보여주었다.
 장녀되는 손동희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손목사님이 환자심방중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며 극진한 사랑과 위로를 베푼병동은 의시들도 치료이외는 지체하며 머물기를 주저하는 중환자실 바로 그환자들에게 손목사의 극진한 사랑의 손길이 항상 함께 하였다는 사실이다.

 

*피난선-애양원에서 부산으로 6.25 당시에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배. 



 6.25 동란시 장로 집사들이 피난을 위하여 배를 준비하여 손목사와 가족들의 피난을 재촉하였으나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어떻게 자신의 안전만을 위하여 떠날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거절하였다.끝내는 양떼들과 함께 공산치하의 핍박을 견디시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선한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참 목자요 선한 모자시었다.

 목자로서의 그의 모범은 맡겨진 양떼를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았다.그는 두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양아들로 삼아 키우는 철저한 원수사랑에도 나타났다.큰딸 손동희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어떻게 남은 가족의 동의도 없이 원수를 사랑하되 양자로 가족으로 데려올 수 있느냐는 딸의 강한 항의에 손양원목사는 이렇게 대답을 하며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오빠로 받아들일 것을 타일렀다고 한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따라 계명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가서 5년간 옥고를 이루었는데 같은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명하셨으니 순종하여야 하지 않겠느냐,십계명도 요약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계명하나는 지키고 다른 하나는 불순종하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러한 구너면도 듣지 않고 오랫동안 아버지의 처신에 반항한 딸을 인내와 사랑으로 끝내 설득시켜 가정의 평화를 이룩했다고 한다.흔히 목회자들이 교회 목회에는 성공하면서 가정목회에 실패한 경우들이 있다.그러나 손목사의 가정은 이러한 목회결손이 없는 가정이었다.두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죽기전까지 전도하면서 순교할 만큼 가정에서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양육시켰다는 점에서 손양원목사의 목회는 먼저 가정목회에서 모범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3.순교자의 모델로 한국교회의 수난사를 빛냈다.

 순교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 길다.교회사는 순교자의 피로 점철되며 기록되었다.그 긴순교역사 가운데 손양원목사 부자의 순교기록은 가장 빛나는 페이지를 장식하리라.
 두아들의 순교를 특별하신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드려 열가지 감사조건을 들어 감사한 사실이며 두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자로 삼아 전도자로 키운일이며 순교사건 다음주일 거액의 감사헌금을 바친일이며 2년후에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순교의 제물로 바쳐진 일들은 실로 순교사 가운데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원형적인 순교사보가 아닐 수 없다.
 오년간에 걸친 긴 감옥생활,뼈속까지 스며든 냉기를 가려줄 따듯한 옷이나 덮을 게 없는 환경속에서 겨울의 추위를 견디어야 하는 긴 형고는 형언할 수 없었으리라.그럼에도 그런 극한 상황속에서도 그는 고난을 신앙으로 승화시켰다.옥중에서 가정에 보낸 서신은 옥고중의 그의 신앙적 수용자세를 보여준다.옥중에서 스라는 반성문 제출의 요구를 받은 손양원목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바쳤다.

 하늘에 어찌 두 해가 있을 수 있고
 일국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있으랴
 우주의 주인공이 어떻게 둘 되겠으며
 십자가의 도외에 구원이 또 어디 있으랴
 세상에는 주인도 많고 신도 많으나 여호와
 이외에 다른신이 내게 없구나
 석가도 유명하고 공자도 성자이나
 오직 내구는 홀로 예수뿐이니
 내 어찌 두신을 섬길 수 있으며 예수님 이외에
 속죄자 어디 있으랴.이신을 위하여 아까울 것
 무엇이며,이주를 버리고서 내가 어디로 가랴
 (손동희저,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p.89)

 


 그는 청주 교도소 독방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가족에게 편지를 보냄으로 오히려 밖에 있는 가족들을 위로 하려 하였다.

 빈방 호로 지키니 고적감이 밀려오누나
 성삼위 함께 하여 네식구(四食口) 되었도다
 온갖고난이여,올테면 다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본가를 멀리 떠나 옥중에 들어오니
 밤 깊고 옥 깊고 마음 가득 수심도 깊다
 밤깊고 옥 깊고 마음 가득 수심 깊으나
 주와 함께 동거하니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고생 4년 길고 긴 날이나
 주와 함께 동락하니 하루와 같도다
 지년4년 평안히 보호해 주신 주는
 미래에도 그리하실 줄 확신하노라 (손동희저,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p.96)

 마치 자신의 옥고를 걱정하는 빌립보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이 자신의 옥중삼락(獄中三樂)을 빌립보1장에서 옮겨놓은 것과 비교되는 성시(聖詩)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실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송죽같은 순교자였다.
주기철목사의 신앙을 한마디로 김인서목사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으로 표현하였으나 손양원목사의 신앙은 '날마다 죽는 신앙'으로 표현함이 적절하리라.


 

 


 4.정통신앙의 수호자요,투사였다.

 일제말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기치아래 한민족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 조선의 일본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신을 모신 신사에 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일제 경찰의 강압에 못이겨 장로교총회는 신사참배요구를 국민의례라는 차원에서 수용하기로 결의하였다.그러나 일부 목회자 가운데 신사참배의 타당성을 일본신민의 애국적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권장하고 나서는 친일적인 목사들도 있었다.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투옥된 주기철목사 가족은 그들에 의하여 목사관에서 쫓겨나는 일까지 일어났다.또 일부 목회자들은 친일적동기에서는 아니었으나 신학적인 차원에서 일본신사에게 참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리화 시켰다.그러나 성경의 가르침대로 믿는 정통적 신앙을 소유한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그것이 제일 계명을 어기는 범죄사실임을 인정하였다.이러한 정통적신앙을 소유한 목회자들가운데 극히 일부 소수의 목회자들이 적극적인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와 맞섰다.그 중에 가장 선봉에서 이운동을 주도한 주기철목사,한상동목사등과 함께 손양원목사는 신사불차배운동을 교회의 순결 및 정통신앙의 수호차원에서 전개하였다.
 그러한 신사불참배운동은 일제의 극심한 박해를 불러 일으켰다.그 박해의 와중에도 정통신앙을 끝까지 지키다 참기힘든 고문과 5년간의 긴 옥고를 치르며 값진 대가를 지불하였다.

*옥중서신 

 

 5.교회관에 있어서 어거스틴적 전통을 따른 지도자였다.

 교회사는 항상 교회의 순결(Purity)과 연합(Unity)사이에 긴장이 있어온 사실을 증거한다.초대교회시대에 로마 박해중에 변절한 지도자와 평신도들을 기성교회가 어떻게 수용할것인가?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 하여야 하는가?이런 문제가 박해가 끝난후에 교회가 당면한 큰문제로 대두되었다.이러한 교회론적 잇슈는 해방후 한국교회도 피할 수 없었던 과제였다.
전후의 한국교회에도 도나투스파의 전철을 밟은 재건파 교회의 탄생이 있었다.
그러나 손양원목사는 순결을 내새워 연합을 깨는 도나투스적 입장을 따르기보다 어거스틴적 교회론에 입각한 관용론을 따랐다.고려신학교의 설립당시 고신운동에 참여하였으나 그것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설립에 참여한 클리어런스 맥카트니(Clearance McCarthney)의 노선을 따름에 비할만한 전통적 교회론의 발현이었다.교회는 회개한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오는 한 탕자의 아버지처럼 수용하는 교회의 모습을 교회사는 증언하고 있다.어쩌면 손양원목사의 이러한 교회론적 처신은 두 자식을 살해한 원수도 회개할 때 양자로 받아드린 아가페적 목회철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진리를 거절하는 이단은 수용할수 없어도 진리를 따르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배도한 후 회개하고 돌아오는 형제는 받아야하는 것은 교회사적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손목사님 당시 교회 전경 


 신사참배를 일제의 강압에 의해 수용한 교회는 부끄러운 '상처를 입은 교회'는 될지언정 그 교회가 다시 그 사실을 회개하고 돌아올 때 재건파에서 주장하는 '마귀당'교회는 더 이상아닌것이다.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함께한 한상동목사의 해방후에도 한국교회의 정통주의 신학운동을 위하여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협력을 하면서도 소위 "총회파"로 알려진 장로교 주류 교회에 속하여 전국교회를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며 회개운동을 통한 영성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한 사실은 교회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손양원목사의 목회자로서의 그의 모범성은 그의 순교에 국한되지않는다.그의 삶 전체가 산순교의 삶이었다.그는 민족주의자도 아니요,신학자도아니요,부흥사도 아니었다.주어진 목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말씀대로 살다 말씀대로 삶을 마친 성자적 목회자였다.그의 삶이 주는 감화와 교회사적인 의의는 순교이전에 참목자상을 보여준 사실과 교권장악이나 교회의순결을 위해 교회의 분열을 쉽게 여기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에 참 지표적 사표(師表)를 보여준 사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오늘의 부흥이 터틀리안의 말처럼 손양원목사같은 순교의 피를 보신 하나님의 축복임을 생각할 때 손양원목사를 한국교회에 선물로 보내주신 사실에 감사하며 이글을 맺는다.

 

김의환목사(손양원목사순교50주년기념대회시 학술강좌 교안)


출처 : CCM 부르는소리  |  글쓴이 : 카리스마 ~♪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