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3.1운동의 교회역할과 익산 4.4만세의거의 역사적 성격
전북권 답사는 익산지역 분 아니라 전북권 3.1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그 역사적 의미를 다음세대들에게 전하기 위한 목적
통합 2018년 기독교역사문화 유산답사 제7차 전북권 해설에 나선 익산제석교회 정경호 목사를 통해 익산 3.1운동의 교회역할과 익산 4.4만세의거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들어본다.
정경호 목사는 이번 전북권 답사는 익산지역 분 아니라 전북권 3.1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그 역사적 의미를 다음세대들에게 전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다.
특히 익산 4.4만세운동은 첫째, 3.1운동의 대중 투쟁 단계에서 지방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만세시위의 대표적 운동이었다는 것과 둘째, 일제의 농지 수탈의 대표적인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저항운동이었다. 셋째, 시위 현장에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해,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국내외에 폭로한 계기가 됐다. 넷째, 시위의 준비와 점화 단계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정 목사는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반일 투쟁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는 단계에 직면했으나 오히려 익산의 4.4 만세운동은 그 절정에 달했다. 6명의 희행은 헛된 순교가 아니었다. 이런 희생을 가져온 4.4 만세운동은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비를 세울만큼 한국독립 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그 역사가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899년 군산항이 개장되고, 러일전쟁 이후에 호남지역 농산물 반출의 전진기지로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을 개설하게 된다. 반면 익산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익산은 전북지역의 요충지로 집중 개발되고,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가지로 조성됐다.
정 목사는 1915년 당시 인구 전체의 60%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어 익산이 대표적인 일본인 도시로 조성되고, 이들은 황무지 같은 전북 일대 땅을 헐값에 사들여 수리시설을 하고 농지로 개발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밝혔다.
그당시 일본인들은 기업 형태의 농장을 설립해 농지수탈과 경영에 나서는 등 전북 전체에 일본인 농장이 40여 개에 이르렀다. 이는 익산이 일본이들의 농장관리의 중심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1910년에는 군산과 익산 간의 철도를 개설해 곡물의 수송 등 경제침탈에 박차를 더해갔다.
1919년 3.1운동 사건 이후에 일제는 기독교 민족운동세력의 근거지가 되는 기독교 교회와 학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정 목사는 “일제가 1910년 중반 포교규칙과 사립학교령을 통해 기독교를 탄압했다. 교회 설립 시, 허가를 받도록 했고, 부흥회와 기도회, 주일예배 등을 방해하거나 경관늘 파견해 설교 등의 내용을 감시히기도 했다. 특히 기독교 학교에 대해서는 예배와 종교교육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익산의 민초들은 1907-1914년까지 의병활동을 일으켰다. 여산, 금마, 황등, 용안, 함라, 춘포 등 10여 곳에서 결성된 익산지역의 의병들은 팔봉, 강경, 관동마을의 일대에서 활동을 했다. 또, 이규홍, 박이환을 중심으로 일어난 익산지역의 의병읃른 천호산을 넘어 비봉면 불당구령에 이르렀고, 이들은 완주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완주, 무주일대의 해산의병을 모아 통합하는 등 1천여명의 연합의병으로 구성됐다.
정 목사는 “전북지역의 만세운동은 총 40회에 연인원 1만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익산지역의 3.1운동은 제석교회를 중심으로 익산과 강경지역의 3.1만세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3.1운동 초기에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연합해 익산지역 16개 전역에서 일어났다. 독립을 기원하는 익산지역민의 갈망은 4.4일 되자 오산 남전교회 사헌부 감찰인 김내문과 최대진 목사, 문용기, 박영문, 백낙규, 오덕규, 박병렬, 김병수 등 기독교 지도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익산 농민수탈의 본부 대교농장 앞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그는 또, 3.1운동 당시 남전교회 담임 최대진 목사는 군산과 전주 등 만세운동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익산에서의 만세운동 계획에 대해 당위성과 필요성을 상당히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오산면세 위치한 일본인 농장주들로 인한 민족적 울분이 커져가고 있을 때, 최대진 목사와 문용기는 4월 4일 솜리의 장날에 거사를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임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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