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V/교회사람들

나의 신앙 나의 삶/전주으뜸교회 이병숙 사모

153뉴스 tv 2014. 11. 25. 21:33

 

 

인생 중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는 자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기울이는 사람이다.

지난달 26일 오후 230분 완주군 봉동읍 구정리에 소재한 열린문교회에서는 헌당식과 함께 장로장립, 권사임직식이 있었다. 이날 헌당식에서는 담임 송백용 목사가 열린문교회(당시 구암영생교회)를 설립한 이병숙 전도사(현 사모)에게 표창을 수여했다.

 

1971년 설립된 열린문교회는 당시 이병숙 전도사(현 으뜸교회 사모)와 최영길 성도 등을 중심으로 전주영생교회 강홍모 목사(소천)의 지원을 받아 구암영생교회가 설립됐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그것도 낮고 천한 막대기와 같은 택한 백성들을 부르시고, 열방을 향해 십자가의 복음을 전케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라고 하는 시골의 지극히 평범한 처녀를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신 것처럼, 아주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부르셔서 교회를 설립하게 하시고, 지역 복음화를 위해 헌신케 하셨어요.”

 

7남매 가운데 맏딸인 이병숙 사모는 조부의 병색으로 인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진학을 미룬채 집안 일을 도우며, 조부를 간병했다. 그녀는 대소변부터 식사까지 조부의 손과 발이 돼 주었다. 조부의 사랑을 받은 그녀는 병색이 깊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항상 안타까워했다. 조부의 간절한 바램과 함께 부친의 권유도 있었다.

저를 특별히 할아버지께서 사랑해 주셨어요.”

 

 

 

 

대농가의 장녀였던 그녀는 정성을 다해 조부를 간호하던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로 전주 영생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런 그가 주1회 진행하던 채플 시간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된다. 당시 그녀의 모친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1125~26절 말씀에 도전을 받았어요.”

채플 시간에 참석하면서 담임 함덕신 선생의 신앙지도를 받던 그녀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모친의 병색으로 인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 장녀의 책임도 있었다.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저희 어머니를 살려주시면, 일평생 헌신하겠습니다.”

은혜를 입는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은혜를 입지 못하면 우리는 제대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다. 이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시골 학생에게 하나님께서는 생명(복음)을 잉태케 하는 큰 은혜를 입게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선후배들간 모여서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채플시간에 열린 집회 시간뿐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의 마음도 다져갔다. 불같은 성령이 그녀에게 임했던 것.

경제적 여유도 있었어요. 하지만 동생과 의논해 자취를 시작했어요.”

7남매의 장년인 그녀는 동생들을 돌보며 자취를 시작했다. 특히 부모님께 대한 효성도 지극했다. 또한 온맘 다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다. 영생교회 인근에 자취방을 얻어 동생들과 자취하던 그녀는 새벽재단을 쌓았다.

 

 

 

 

어느날 꿈에서 교회 종소리를 들었어요. 3회 잇달아 종소리를 듣고, 교회에 동생과 함께 교회로 달려갔어요.”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녀는 동생과 함께 교회에서 기도했다. 기도하던 가운데 그녀는 환상을 경험했다. 비바람이 거세게 불던 새벽녘에 그녀는 고향 구암저수지로 인도받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바닥이 드러난 저수지에서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이때 그녀를 인도한 사람이 네가 이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음성을 듣게된다. 수많은 물고기가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종소리에 재정신이 들었다. 이 체험후 그녀는 마을과 마을 주민들을 위한 거룩한 부담을 갖게됐다. 가족과 친지, 마음주민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자기의 목숨과 가족과 사랑과 명예와 행복을 송두리째 희생할 각오가 없이는 내릴 수 없는 결단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갈등이 있었어요. 장래에 대한 비전, 그리고 과연 부족하고 여린 소녀가 복음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어요.”

기독학생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돈독한 신앙을 다져가던 그녀는 장래에 대한 걱정과 마을주민들을 향한 복음구령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자율학습 시간에 성경을 보던 그녀에게 요한복음 1224절 말씀으로 주님이 찾아오셨다. 이 말씀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어떤 일에 작은 밑거름이 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밑거름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희생 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갈등 가운데 결단을 내렸다.

 

 

대학진학과 함께 고향에 대한 부르심, 이 두 가지는 항상 갈등이 있었어요.”

신앙 등 지도를 받던 그녀는 강교실 선생을 찾아 상담을 받았다. 그녀는 강교실 선생의 도움으로 마일즈 선교사의 유학 제시와 함께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신학교 입학 권유도 받았다. 그녀는 그러나 지도교사, 부친 등 오해를 받으면서 고향 구암리 복음화를 위해 달려갔다.

“3학년 때에 맞이한 성탄을 앞두고 새벽송 시간에 에수님께서 천군천사와 함께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목도했어요. 깜작 놀라 엎드러져 있는데, 예수님께서 저를 붙드시고 바다를 건너서 초가집에 내려 놓으셨어요.”

구암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부친과 교사들의 반대에도 그녀는 고향에서 정착하면서 전도를 시작했다. 주일에는 10리 거리에 떨어져 있는 석정교회에 출석했다. 이형태 목사의 모친부터 그녀는 복음을 전하고, 이형태 목사 등 3남매와 함께 석정교회에 다녔다.

 

 

석정교회 최순홍 장로님께서 구역예배를 저희 마을에서 인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항상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구역예배 인도자로 세워진 그녀에게 하나님께서는 친구의 모친을 통해 구역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시간이 흐르면서 또다른 비전을 주셨다. 교회설립에 대한 꿈이었다. 그러나 교회설립과 교회건축은 어려운 문제였다.

당시 교회건축에 따른 부지구입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예비해 주셨어요.”

막른 막대기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병숙 사모에게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셨다. 심장질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마을의 한 여성을 들어 사용하셨다. 그녀를 심방하면서 기도하면서 질환이 완쾌된 것. 그녀의 남편의 승낙으로 하우스교회를 앞마당에 설립했다. 이 하우스교회에서 그녀는 매일 새벽기도회와 삼일밤예배를 드렸다.

 

“2년 후에는 부지매입과 성전건축에 대한 기도를 시작했어요. 여동생에게 강교실 선생님을 찾아가 뵙고 건축상황을 전하라고 했어요.”

그녀는 마태복음 1616절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성전건축에 필요한 부지매입 재정 등을 놓고 하나님께 무릎으로 나아갔다. 교인들과 함께 기도하며 건축헌금을 작정했다. 그런 그녀에게 하나님은 또다시 응답해 주셨다. 영생고등학교 재학시절 음악과 신앙지도를 받은 강교실 선생님을 통해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 3일간 강교실 선생은 그녀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성령의 역사였다. 이 건축상황에 대해 강 교사는 부친 강홍모 목사(당시 장로직분)에게 전달했다. 교회에서 당시 설교를 하면서 강홍모 목사는 사례비를 선교비로 저축하고 있었다. 이 선교헌금이 구암리 교회건축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예비해 두셨다.

 

“74년까지 마을에서 목회하면서 야학을 통해 계몽운동과 함께 후학들을 배출했어요.”

그녀는 복음구령과 함께 야학교를 통해 후배들을 배움의 길로 인도하는데, 그 역할을 다해냈다. 이때 배출된 학생들 가운데 최춘식 목사, 이형태 목사 등이 목회 현장에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다. 그녀 자신도 영생대학교와 전북신학교를 졸업하는 등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임건호 목사(으뜸교회)와 결혼하고, 1984년 김제시 율촌면 장화리 마을에 장화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곳에는 7개 마을 가운데 유일하게 교회가 없었어요.”

전북신학교 졸업반이던 그녀는 도다시 도전에 나섰다. 건축을 시작한 것. 그러나 건축장소는 절대농지였다. 건축을 할 수 없는 부지였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무릎으로 도다시 나아갔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절대농지에서 상대농지로 용도변경이 이루어졌다. 무러서지 않는 그녀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셨다.

/임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