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 기적
제가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의 감격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평생을 장님으로 지내다가 생전 처음으로 광명을 본 것 같았습니다. 개안(開眼) 수술 받고난 후의 상황을 실제 겪어보지도 않고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그런 분들에게 큰 실례일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 동안 눈앞을 뿌옇게 가리고 있던 것들이 완전히 걷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 깨우침을 얻었다거나, 도덕적으로 월등하게 의로워지거나, 영적으로 아주 신령해졌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를 몰랐던 지난 세월이 너무나 헛되고 헛되었다는 사실만은 철두철미 깨달았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된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요 소중한 일로 분명하게 다가왔습니다.
다른 말로 내 자신의 실체 모습을 완전히는 몰라도 일부라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죽으라고 달려왔던 인생 방향이 진짜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대로 가면 갈수록 갈급함과 허무만 늘어날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무참한 실패와 절망의 나락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 인생을 이전의 방식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유턴(U-turn)했습니다.
그런데 믿고 난 후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깨달음이 결코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을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습니다. 예수쟁이들은 정말 그 꼴도 보기 싫었습니다. 예수 본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학교에서 배운 인류 사대성인 중의 한명이라는 상식뿐이었으므로, 개인적인 감정이나 관심이 별달리 생길 리도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가 옳다면 그 신자도 그와 비슷하기는 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니까 예수와 기독교에 잘못이 많은가보다 지레짐작만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 그분조차 있는지 없는지 관심이 없었으므로 막상 예수는 아예 뒷전이었습니다.
제가 믿을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어떻게 믿어질 수 있습니까? 아니 오히려 최고로 싫어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최고로 좋아질 수 있었겠습니까? 내 밖의 제 삼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물론 믿는 과정, 정확히 말하면 믿어지게끔 되어져 가는 과정 중에 제 지정의의 개입은 전혀 없이 어느 순간 “뿅!”하고 득도하듯 믿게 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분명 제게 믿어볼 마음이 생기고 이런저런 결단도 스스로 내렸습니다.
그러나 예수쟁이들은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했고 심지어 예수를 먼저 믿었던 집사람더러 성경이 눈앞에 보이기만 하면 갖다 버릴 것이라고 호통 쳤던 저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믿어볼 마음이 저도 모르는 은연중에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은 제 의지의 작동과는 무관하다는 반증입니다. 믿음 자체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신자들만의 비밀입니다.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겪고 깨달은 실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믿음이 생김과 동시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그분의 모든 말씀과 사역, 초자연적 이적들, 십자가 처형과 부활 등도 엄연한 사실로 바뀌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의심의 먹장구름이 순간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말도 안 된다고 반발했던 일들이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온 이후로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맹목적 의무적으로 믿어보기로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각 사안에 대해 우선 확신부터 심겨졌고 또 그 믿음의 근거와 이유까지 성경 말씀을 통해 명료하게 깨달아졌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저라는 존재부터 제 의지와 상관없이 완전히 바뀌었던 것입니다. 제가 봐도 저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노력으로 몇 가지 결점을 고쳐서 신령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영원히 살아 계신 예수님이 저를 먼저 찾아와 만나 주셨고 또 그분이 저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 아이들은 아빠가 예수 믿은 것만 봐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틀림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정말로 제가 생각해도 예수 믿은 것 자체가 너무나 큰 기적이며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감히 단언컨대 예수를 믿고 난 이후로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 또한 믿음을 갖게 된 것 이상으로 큰 기적이라는 것을 절감하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단순히 기도하여 어려운 문제를 해결 받는 은혜를 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기적 삶에서 이타적으로 그 방향이 바뀌었다는 윤리적 의미도 아닙니다. 그분의 새로운 피조물로 바뀐 저를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날마다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향방 모르면 방황했던 불신자 시절과 대비해 너무나 의미 있고 소중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왜 내가 진작 일찍 예수를 믿지 않았던가, 왜 내 주위에는 나를 전도하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가, 왜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갈등해 보지 않았던가, 식의 후회들이 필연적으로 따랐습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 그대로 제 주위에 불신자들만 들락거렸음에도 오히려 하나님에게 적잖이 불만을 토로한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그분께 잘못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빨리 믿었더라면 지난 시절의 많은 고난과 방황과 실패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으리라는 후회도 솔직히 있었지만, 그보다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그만큼 모자라게 살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되는 식구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4-37)
예수를 처음 믿은 자로선 당연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그 좋고 귀한 예수를 소개하려 시도합니다. 정말 설렘과 기쁨을 가득 안고 이 땅에는 없는 가장 귀한 보배를 전해주려 시도해봅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오는 반응은 기대와는 전혀 반대입니다. 오히려 신자더러 기왕에 믿은 그 믿음을 버리라고 설득하거나, 심지어 야단치며 의절(義絶)까지 합니다.
그 가장 자주 드는 이유로는 예수 믿으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예수 믿으면 집안에 종종 우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공통적으로 그런 우려를 나타낸다는 것은 그만큼 실제로 많이 체험하는 현상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아 형통해져야지 왜 우환이 생깁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마저 그 점을 미리 염려했습니다. 식구끼리 원수로 삼게 만들어 주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예수님이 그런 우환을 일으켰거나 방치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럼 다른 식구들이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나아가 신자 가족더러 당신을 믿지 못하게 설득하고 야단친 것에 대해 벌을 내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식구끼리 원수가 되더라도, 바꿔 말해 집안에 우환이 생기더라도 예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당신을 믿는 것과 현실적 형통과는 관계없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식구끼리 원수가 되는 것보다 예수 믿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통념으로는 인생살이에 가족끼리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토록 가족의 화목과 형통을 목적으로 삽니다. 현실에서 그 일마저 뒷전으로 쳐야 하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생명이 걸린 것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삶과 죽음을 가름하는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다른 종교는 다 그냥 두고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저도 불신자 시절에 그랬듯이, 아무리 작은 허물이라도 절대 흘러 넘기지 않습니다. 별로 큰 허물이 안 되는 것마저 침소봉대하기 일쑤입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에 대해선 별로 반감이 없는 데 반해 특별히 예수 믿는 것만은 문제 삼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가 현실 형통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데 반해서 기독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 형통이 아니라면 신자 본인의 영혼에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주변상황을 개선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존재 자체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데에만 초점을 둡니다. 당연히 인생의 목표를 현실 형통에만 두는 자들로선 그 목표와 무관한 기독교를 유난히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인식도 없이 무조건 예수를 그것도 아주 극도로 싫어합니다. 신자들이 이유 없이 꼴도 보기 싫고 예수 믿을 마음은 추호도 생가지 않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싫다는 것은 지정의 차원을 넘어 영적인 원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죄악에 탐닉해 있는 한 죄인을 예수님이 그 존재의 근원부터 새롭게 바꿔주려 한다는 사실을 그 사람의 영이 미리 알아채고는 거부하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수인 사단이 그 불신자의 영혼을 미혹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현실의 형통에만 두는 자들은 종교도, 말하자면 하나님도 그 일에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자 곧바로 우환이 생기면 결국 예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밖에 생각 못합니다. 당연히 처음 믿은 신자마저 예수 믿는 일을 재고하려 들 것이며 불신자인 집안 식구들은 드러내놓고 반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역반응이 생길 것이 너무나 빤한데도 예수님이 우환을 일으킬 리는 없습니다. 사단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정작 살펴보아야 할 사항은 사단이 그렇게 하는데도 하나님이 묵인하시는 이유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분다운 역사입니다. 갓 믿게 된 신자더러 신앙의 출발을 올바른 기초 위에 확실히 세우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 풍요로운 것과 예수님과는 전혀 연관이 없음을 처음부터 제대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아가 집안의 반대자들에게도 그런 것만 부추기는 여타의 종교와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뜻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예수님으로선 식구들이 신자와 그가 믿는 기독교와 점점 더 멀어지고 원수까지 되어도 괜찮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것입니다. 식구들을 미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의 본성과 어울리지 않게 타협하면서까지 당신 자녀의 숫자만 많아지는 것을 주님은 절대 원치 않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순수한 신앙을 가진 자를 찾으십니다.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래로 자발적으로 당신 앞에 겸비하게 나오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원칙은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몫이다.
신자가 정말로 순수한 동기와 열정으로 전도했는데도 상대의, 특별히 가까운 자들의 반응이 시원찮으면 차츰 짜증나기 시작하다가 심하면 분노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솔직히 상대가 영적으로 아주 열등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아니 이렇게 쉬운 진리를 못 알아먹는다는 말인가?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앞뒤가 막혔어. 평소에 의롭게 사는 것 같더니 알고 보니 속물이네. 하나님! 간절히 기도하고 온갖 멸시를 받으며 전했는데 당장 교회는 안 가도 마음 문은 조금 열려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나를 가장 잘 알기에 믿고 따라주어야 할 제 남편(아내)마저 더 반대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등등 온갖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은 전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도란 그야말로 전도(傳道)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그에게 예수를 믿는 도를 전하는 것”이지, “그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끔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를 구원과 혼동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죄에 빠져 죽어 있는 한 영혼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아무리 방금 예수 믿은 감격에 들떠 성령 충만해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으로 말해 사단이 인간 영혼을 현실과 죄악에 묶어 놓고 있는 힘이 아주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불신앙의 원인이 오직 사단에게만 있고 인간 책임은 모면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의 주인이 되겠다고 설치는 고집이 너무나 완악하고 추하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도를 전해 듣기는 들어도 자기가 인생과 세상의 주인이 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한 절대 따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도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간더러 그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하나님을 모시라고 권하기 때문에, 지금껏 인생과 세상의 주인 된 재미에 푹 빠져있는 모든 인간이 무조건 싫어하는 것입니다.
신자로선 믿기 전 자신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솔직하고도 겸허하게 회상해 보아야 합니다. 현재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옛 모습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친구가 십자가 진리를 전해 주어도 콧방귀만 뀌었지 않습니까? 돈 버는 일에 하등 도움 되지 않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집어치우라고 면박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기 올챙이 적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 상대를 믿게 만들려 듭니다. 그 열성과 진심은 좋지만 그러다보니 전혀 기독교적이 아닌 방법도 동원됩니다. 방법만 그러면 다행이련만 나중에는 그 전하는 내용까지 비성경적으로 됩니다. 믿기만 하면 형통하고 모든 염려가 사라지니까 일담 믿어보라고만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하나님 대신에 자기 교회의 담임 목사를 믿으라는 식으로까지 진전되고 자기 교회의 여러 장점들을 자랑하기 바쁩니다.
전도란 누군가 비유한대로 먹을 것을 발견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어디에 가면 먹을 곳이 있다는 정보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또 바로 이런 까닭에 상대가 아무리 예수 이야기에 귀를 막더라도 전해야만 합니다. 최소한 전하고 싶은 열망 내지 소원은 생겨야 합니다. 먹을 곳을 발견한 거지가 동료 거지의 딱한 형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거지라고 할 수조차 없지 않습니까? 마침 먹을 수 있는 양이 일인분 밖에 안 된다면 몰라도 그 먹을 것이 무한정 있는데도 그러면 어찌 됩니까?
그러나 실제 전도의 현장에선 상대 거지가 자기는 거지가 아니라고 우기니까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전도란 새로운 먹을 것을 구해서 먹여주는 것도 아니요, 심지어 먹을 곳까지 데려가거나 가는 길을 알려 주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그 사람으로 자신이 거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해주는 일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여운 것인지 실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껏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큰 소리 쳤지만 사실은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하며 불완전하고 심지어 더러운 존재이지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상대더러 거지라고 지적하면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죄인이니 예수 믿어 죄 사함 받아라.”고 권하면 십중팔구 “내가 왜 죄인이며 설령 죄인이라고 해도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하느냐?”고 반발하지 않습니까? 신자는 이미 깨끗해진 양 하고 상대만 더럽다고 하는데 누가 그 권면을 수용 아니 동의라도 하겠습니까?
결국 전도란 전하는 자부터 본인이 거지라는 것을 먼저 밝히는 작업입니다. 정확하게는 이전에는 아주 비참한 거지였고 지금도 거지이긴 마찬가지이지만 이제는 먹을 곳을 알게 된 덜 비참한, 아니 살 길을 찾은 거지라고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전하고자 하는 상대의 현재 상태가 바로 신자의 옛 상태이며 그들이 갖고 있는 갈등과 문제가 바로 이전의 자신의 문제와 동일하다는 점을 상대에게 주지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그 동일한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을 발견했다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26-31)
한 마디로 교회 안에는 이전에 거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사람들만 모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부자라고 큰소리치는 자들을 하나님의 뜻 안에선 오히려 부끄러워지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거지이면서도 자기는 거지가 아니라고 고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직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도 여전히 거지이긴 마찬가지이므로 나서서 자랑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전도란 거지라고 먼저 깨닫게 된 자가 상대도 거지임을 상대의 반발과 거리낌을 최소한 줄여서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도 십자가뿐이다.
그럼 어떻게 전도자 본인부터 거지임을 상대에게 제대로 밝힐 수 있습니까? 그것도 자기는 거지임을 어지간해선 인정하지 않기에 십자가 복음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으려 고집하는 불신자들을 상대로 말입니다.
놀랍게도 그 답도 사실은 십자가 복음뿐입니다. 자기가 체험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전하는 수 말고는 어떤 인간의 영적 피폐함도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일 방법은 없습니다. 전도자 자신이 거지라는 것을 알게 된 계기도 어느 날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만나 주셨고 또 당신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셨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분의 십자가에 비춰진 자기 모습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했더라면 전도자부터 자기는 거지가 아니라고 여전히 항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진실하고도 온전하게 전해진 복음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반드시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제 경험을 다시 반추하자면 교회에 출석하여 근 반년 동안 예수님의 복음서 강해설교를 들을 때마다 제 심령은 속에서부터 흐느꼈습니다. 십자가의 너무나 큰 사랑이 제 영혼의 더럽고 추한 맨 밑바닥부터 채우며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전도란 복음을 정말 복음답게 전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독교 구원의 교리를 관념적, 철학적으로 가르치려 들어선 안 됩니다. 전하는 자부터 복음 이전의 자신의 더럽고 추했던 정확한 실체와, 복음으로 옛 사람은 산산조각 나고 새 사람으로 거듭 난 상태와, 현재 예수님과 동행하며 누리고 있는 은혜들을 한 치의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작금 유행하는 간증집회 식으로 “기도 응답 받은 자기 체험”을 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처음 만났던 사실에 관한 이야기여야 합니다. 자기 존재를 변화시킨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극한적 상태에 있든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있어도 그분의 사랑은 전혀 구애 받지 않고 그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진리를 자기 체험을 통해 소개하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1:1-3)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제자, 요한 사도가 실토한 대로 전도란 예수를 만난 자가 그 만남이 어떠했으며 그 만남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전도자부터 이전에는 비참한 거지였고 현재도 예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지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을 것 아닙니까?
새삼 강조하지만 그 이상 나아가려 해선, 말하자면 자기 능력으로 상대를 믿게 만들려 해선 안 됩니다. 여전히 거지인 자가 어떻게 다른 거지를 부자로 만들 수 있습니까? 자기 능력으로 부자가 되었고 이젠 홀로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럴 수 없습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7-9)
바울 같은 사도마저 하나님이 자기를 거지가 되도록 하여 전도하게끔 했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스스로 부자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마저 자기 믿음을 자랑하며 왕 노릇 한다고 합니다. 구원도 자기 방법으로 취득했다고, 말하자면 나는 영적으로 남들보다 깨어 있어서 예수를 믿을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고 또 내가 노력하여 믿었다고 자랑하기 바쁩니다. 스스로 자기 배를 채웠다고 여기기에 아직 거지로 있는 사람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생길 리도 없습니다. 전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를 전하되, 전도자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만 전해야 합니다.
견고한 성채부터 부숴라.
마지막으로 전도자가 유념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불신자는 영적으로 봉사이며 그 영혼을 새롭게 바꾸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그래도 믿음은 들음으로 나는 것이며 듣지 않고는 복음을 알 수 없기에 신자는 십자가 진리를 말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그런데 문제는 그 영혼이 사단에게 너무나 오랫동안, 나면서부터 그 때까지,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뒤틀림으로 인해 그들의 사고방식마저 즉 인생관, 역사관, 가치관 등도 똑 같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온갖 편견과 선입관과 독선이 가득 차 있음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복음의 빛이 그 심령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아주 견고한 성채가 그들 영혼의 외벽, 즉 지정의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현상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고전1:18)으로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려한 것”(고전1:22)이 된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해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는 자들조차 그저 그분의 복만 받으려 들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자기 관념상으로 인생의 진리를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모르는 자들 모두에게 십자가가 장애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복음을 순수하게 전하되 불신자들이 고집스레 갖고 있는 왜곡된 개념들을 사전에 혹은 동시에 제거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이 영원한 진리일 뿐 아니라, 실제로 현실의 삶과 인생에서도 충분히 적용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변호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말하자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가슴뿐 아니라 머리에도 확실한 근거를 두게 해야 합니다. 불신자의 지정의 속에 있는 견고한 성채를 하나씩 부수어 나가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견고하기 때문에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그러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바로 복음부터 갖다 밀어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될 만한 분위기부터 사전에 조성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전도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존의 인간관계를 새롭게 형성하는 일입니다. 흑암이 더 좋아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고집하는 자에게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며, 아니 상상조차 못하는 빛의 세계로 권면의 말로서 초대하는 작업입니다. 그야말로 오랜 인내가 요구되며 진정한 사랑의 섬김이 뒷받침 되어야만 합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신자 스스로 자기 믿음과 열성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이 불신자의 영혼에 간섭해야만 합니다. 그 간섭이 용이하게 되도록 불신자와의 인간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래서 신자더러 가장 가까운 이웃부터 사랑하고 작은 일부터 충성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전 5:14-16)
새로운 관계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희생과 수고와 섬김이 따르기 이전에 가장 먼저 전도자의 영적 자세부터 바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외모로 알지 아니했듯이 이제는 어느 누구도, 당연히 사단에게 심하게 묶여 있는 자를 포함해, 외모로 알지 아니 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지으신 그분의 자녀인데도 영적으로 무지해져 그분의 은혜 가운데 들지 못한 불쌍한 존재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 은혜가 너무 귀하면 귀할수록 더더욱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소망과 열정도 따라서 커져야 합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한 영혼을 새롭게 살려 하늘의 생명책에 올리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신자의 전도에서부터 본격적인 첫 단계가 시작됩니다. 본격적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환경과 사건을 통해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한 불신자의 심령의 문을 이미 오래 전부터 밖에서 계속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뭔가 자신의 신상에 예사롭게 넘겨선 안 될 일들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짐작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아직 듣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신자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통해 이제껏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생전 처음으로 영적인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전도에 대해 정말 겸비해져야 합니다. 정말 한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되고 있음을 절감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굳게 결단하여 온갖 수단 방법을 강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 자신부터 영혼에 예수의 영으로 충만해지고 입술에는 복음으로 가득 차있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일어난 자신의 변화에 대해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여전히 거지의 심정으로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거지들을 인도하며, 또 가는 길에 장애가 있다면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초신자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부터 그 좋은 소식을 함께 나누고 싶은데도 접하는 반응이 극렬한 반대인 까닭이 무엇입니까? 답은 두 가지입니다. 가까운 사람이 신자가 되면 과거의 모든 허물들을 비롯해 지적, 영적 수준을 가족과 친지들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키운 자식이나 가르친 동생이 이제 자기들을, 그것도 영적인 문제로 계도하려 드니까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가까운 사이니까 신자로선 더 안타까워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인간적 열심과 노력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전하지 못하고 개인적 욕심이 들어가며 또 그럼으로써 성령이 역사하는 능력은 감소되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한 마디로 십자가 복음이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전하는 자의 실제 삶에서부터 복음이 확실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이 명확하게 보고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변화된 삶과 성경 말씀의 진리 됨을 두 매개체로 삼아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올바르게만 전하기만 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더욱 전도만 하지 구원하려 들지 마십시오. 원수가 되어도 좋으니 절대 실망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서 그 복음 안에 자신의 바뀐 모습을 보이십시오. 그러면 서로 간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서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그들 또한 반드시 십자가 앞에 꿇어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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