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V/교회사람들

전북기독TV 크리스챤 초대석/신효범장로

153뉴스 tv 2012. 7. 28. 23:31

 

고아에서 미국의 상원의원까지, 인생 역경을 희망으로 만들어온 사람이이 있다. 바로 현 워싱턴주 상원부의장인 폴신, 신호범 의원이다. 늘 '왜, 왜, 왜?'를 외치며 불안과 초조속에 비관적으로 살다가 양부모님의 헌신적인 관심과 믿음과 사랑 덕분에 긍정적인 사람이 됐다는 그는 '미국은 아버지의 나라, 한국은 어머니의 나라'라며 두 나라의 다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한국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주 상원 부의장에 오른 폴 신(Paull Shin·한국명 신호범·66)의 인생은 영화보다 드라마틱하다. 공화당 우세지역에 26년 만에 민주당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을 낳아서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처음 워싱턴주 하원의원에 출마한 곳은 백인이 90%이상 거주하는 곳이며, 전통적으로 공화당 지지지역으로 동양인으로 민주당 후보인 신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매우 낮은 지역이었다. 그를 전북기독방송에서 만나봤다.

-.의원님 정말 반갑습니다. 어제 수요일 밤에는 전주 현암교회에서 신앙간증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북기독TV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전북기독방송시청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환영해 주셔서 감개무량합니다.

-. 이번에 전주에 찾게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11년 전 워싱턴 주의 상원의원 신분으로 전라북도와 자매결연을 주선했습니다. 그 일로 전라북도는 지금까지 자주 찾게 되었습니다. 또, 현암교회 최원탁 목사님의 초청으로 9일 오후 7시30분에 교회 본당에서 저의 삶과 신앙을 간증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지난 4.11총선때 전주 완산갑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상직 의원과는 오래 전부터 특별한 만남이 있으셨다고요?
“이상직의원과는 한미문화사업회 사업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저와 이의원과는 ‘부자’ 관계입니다. 이 의원이 당시 이스타항공 업무관계로 워싱턴을 자주 찾았습니다. 워싱턴에 보잉항공사가 있습니다. 이 일로 친구가 되었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발전돼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 일찌감치 세계 정치. 경제의 1번지, 미국에서 정치인의 길을 걸어오셨는데요. 정치인생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6세 때 가출, 거리의 깡패 소년으로 전전하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중, 1955년 열아홉살 때 입양돼 미국으로 건너온 지 46년 만에 이룬 꿈입니다. 55년 9월 부산항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배에 오르면서 한 맺힌 이 땅을 영원히 밟지 않으리라고 다집했습니다. 하지만 이국 땅에서 차별과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한국인으로서 지지 않겠다는 오기와 자각이 있었습니다. 뿌리를 알아야 미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뿌리를 잃으면 부초처럼 흔들리다 말지요. 소수민족을 대변해야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5선까지 이르는 축복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

-. 사실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차별 등을 누르고 의원으로 당선된다는 게 쉽지 않은 일 아닙니까. 당시 별명이 ‘문 두드리는 정치인’이었다고 하는데 그 뜻이 무엇이었나요?
“1994년 연방하원 선거에 이어 96년 워싱턴주 부지사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자, 우즈베키스탄으로 홀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아' 할머니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할머니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는데,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항거하다 무참히 살해됐다고 합니다. 항상 조국을 그리다가 딸의 이름을 '조선아'라고 지어줬다고 하더군요. 그분들의 역경을 어찌 제가 미국에 와서 고생한 것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98년에 다시, 주위 사람들이 무모하다고 말리는 주 상원의원 선거전에 뛰어들었습니다. 스노호미쉬 카운티에서 출마한 그의 공화당측 상대는 시장까지 지낸 우드(Wood) 여사였습니다. 10개월 동안 하루 10시간씩 혼자서 가가호호를 누볐습니다. 한국에서 입양 온 사람인데 그동안 이곳에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보답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뚜껑을 열자 58% 대 42%, 저의 승리였습니다. 이때, 얻은 별명입니다.”

-. 美상원 5선 의원으로 "기적의 꿈을 이룬 의원님의 마지막 꿈은 선교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신학 공부를 통해 하나님이 지켜주신 은혜를 소외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남은 生을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하셨다고요?
“차별을 많이 당했습니다. 이발소도 못 가고, 학교 진학, 사업 등 모두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뒤에서 잽스(japs·일본인을 낮춰 부르는 말)니 친스(chins·중국인을 비하 하는 말)니 하면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나이가 많아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검정고시로 고교과정을 마친후, 브리검 영 대학 정치학 학사, 피츠버그大 국제관계 학 석사, 워싱턴大 역사학 박사를 거쳐 하 와이大-메릴랜드大 등에서 31년간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교수 생활을 하면서 부동산 중개 및 아파트 개발사업 등으로 재산을 모았습니다. 제가 가장 어려울 때, 함께 동행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했습니다.

-. 이런 열정은 그동안 의원님께서 살아오신 결코 순탄치 않은 인생길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싶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했던 자기 과거는 애써 숨기려 합니다. 그런데 의원님께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마다 고아 출신이고 입양아였던 것을 들어 내 놓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한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지나가던 미군 트럭에 「픽업」돼 미군부대 하우스보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장교 7명의 군화를 닦고, 방 청소 를 하는 사환 노릇을 했습니다. 『구드 모닝가 싸(Good morning, sir)』란 되지도 않는 영어 발음을 씩씩하게 외쳐대며 총알처럼 빠르고 부지런하게 일하던 저에겐 「벅 샷(buckshot·사슴사냥용 총탄)」이란 별칭이 붙었습니다. 당시 저를 제일 믿고 사랑해주셨던, 군의관 레이 폴 대위님께서 1953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18세이던 저를 양아들로 입양 , 미국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미국은 지금과 비교하기 힘들 만큼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흑인도 제대로 사람 취급을 안해주는데, 동양인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하우스보이 시절에 제가 모시던 흑인장교의 막사에 들어갔더니 서럽게 울고 있더군요. 소령 진급에 떨어진 그는 자기 손을 꼬집으며 ‘이것 때문에 안된다’며 피부색을 원망하는 걸 봤어요. 제가 양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다문화가족들을 위해 대변함으로써 빚을 갚아가고 있다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 현재 미국 내에서 재미동포와 한인교회의 위상은?
“아무리 차별을 당해도 나는 내 뜻으로 미 국에 건너온 1세대니까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 만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미국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어떡할 것인가. 그래서 정계진출을 결심했습니다. LA 흑인 폭동 때 한국출신 정치인이 있었다면 그렇게 우리만 일방적으로 당하진 않았을 겁니다. 미국은 말을 안하면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우리 한인을 대변해줄 정치인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지금은 교포들과 교회의 미국내 위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얼마 전에 소천한 강영우박사의 신분이 말해주 듯이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한민족들의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 세계 입양아 협회 고문으로서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새희망을 찾아주고 계신데요. 세계 입양아협회는 어떤 단체입니까? 실제 입양을 해서 아이들을 키워오셨잖아요. 입양의 기쁨!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특별한 단체는 아닙니다. 입양아들이 모여 만든 단체입니다. 가진 자들이 버림받을 아이들을 위해 가족의 구성원으로 따뜻하게 대해주면 아이들은 올곧게 성장합니다.
저도 아홉 살이 됐지만 학교에 갈 수가 없었어요. 추운 겨울날 친구들이 책가방을 들고 학교 가는 게 너무 부러워 무작정 따라 나섰죠. 교실 안에 들어가진 못하고, 창문 너머로 흑판을 넘겨다보며 공책에 필기를 하다 지나가던 한국인 순사에게 들켰습니다. 나쁜 일을 하다 들킨 듯 마구 도망치는 저를 순사는 집요하게 따라왔습니다. 마침내 그를 붙잡은 순사는 귀싸대기부터 한 대 갈긴 다음 뭘 훔쳤냐고 꾸짖었지요. 제가 울면서 공책을 보여주자 그제야 전후 사정을 깨달은 순사는 저를 식당에 데려가 국수를 사주고는 어려워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했습니다. 한번의 친절과 사랑은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들을 입양해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 의원님처럼 뚜렷한 목표의식과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싶습니다. 우리나라 청년들과 크리스챤 초대석 시청자들께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첫 선거에서 실패후, 아무 이유 없이 삶의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동포들을 보며 나 자신에게 한 다짐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후보들이 흔히 하는 편지 보내기론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 가가호호 방문에 나섰습니다. 저는 5개월간 매일 아침 9시부터 밤 늦게까지 모두 1만4천 가구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보통 후보들의 열 배가 넘는 방문 유세를 한 그에겐 ‘문 두드리는 정치인’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유세기간 중 신발 네 켤레가 닳아 못쓰게 됐습니다. 집에 와선 소금물에 발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습니다. 평생 흘린 땀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6년 뒤 도전한 1998년 州 상원의원 선거 때는 2만9천 가구를 방문했습니다. 비오는 날 바닷가 언덕 위의 집을 걸어 올라가면 집주인이 나는 공화당원이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정성을 봐서 당신을 찍겠다며 커피를 대접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려운 일에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같습니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젊고 아쉽잖아요. 어떤 일이든 도전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면 된다(You can do)는 신념으로 대담하게 앞에 놓인 문제들을 개척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올해 초 최근 3년간 새만금을 찾은 오피니언 리더들일 무려 만 명에 달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의원님의 이름도 볼 수 있었는데요. 새만금, 어떤 의미의 땅이라고 보십니까?
“새만금이란 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땅입니다. 교통 환경이 개선되고 복합 단지 조성으로 첨단 산업의 진보와 국제 비즈니스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새만금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일까요? 바로 산업단지의 활성화입니다. 새만금에는 넓은 토지를 기반으로 과학연구단지, 관광단지, 국제 업무단지 등 보편화된 첨단 산업단지의 결정체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설들이 외국의 투자를 촉진하고 우리 과학 산업의 신용도를 높여 준다면 자본 유치뿐만 아니라 한국의 위상도 높아질 것입니다.”

-. 사실 전라북도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이제는 국책사업으로써 더 탄력을 받아 추진되고 있는데요. 새만금 사업의 성공,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시는지요.
“다양한 산업발전으로 인해 토지가 부족해진 21세기의 대한민국. 새만금 사업은 이러한 토지 부족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그리고 친환경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사업입니다. 우리의 과학 기술과 비즈니스 능력, 그리고 우수한 서비스업의 조화를 이곳에서 경험하게 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최첨단 산업단지로 도약해 나가는 새만금 사업에 힘찬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대담/윤미영 아나운서, 정리/임채영보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