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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경의 열매] 이평해 (1) 불교계 지도자에서 주님의 종으로

153뉴스 tv 2007. 6. 28. 23:55
[역경의 열매] 이평해 (1) 불교계 지도자에서 주님의 종으로

“하나님,당신이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저를 살려주세요. 저는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 곁으로 다가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저는 지금 너무 두렵고 떨립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이 고비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제게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제발 하나님….”

1998년 7월의 어느날,그는 지붕의 용마루를 끌어안고 기도에 매달렸다. 미친 듯이 외치는 그의 기도는 차라리 울부짖음이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인들 이렇게 절박할까 싶을 정도였다.

그때의 그 남자가 바로 나,이평해이다. 당시 강원도불교신도회 회장인 내가 집옆에 기도원을 지어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를 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몰려 왔다. 그들은 나를 그냥 놔두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린 나는 급한 김에 지붕으로 피신했다.

밑에서는 “배신자 나와라!”고 소리를 질러댔고 지붕 위에서는 “하나님,살려주세요!”를 외쳐댔다. 30여분 동안 이런 상태가 지속됐으며 나는 눈물을 족히 한 바가지는 쏟아낸 듯했다. 얼마나 하나님을 외쳐댔는지 목도 꽉 잠겼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내 내면이 달라졌다. 얼마 전까지 불안하고 두려웠던 생각들이 사그라졌다.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하나님께서 담대함을 주신 것이었다. 여전히 문앞에서는 많은 사람이 “배신자 이평해 나와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집과 지붕을 연결하는 통로를 타고 집으로 내려와 문을 열고 그들과 마주했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그 전에 나도 한 마디 해야겠소. 지금까지 나는 불교계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왔소.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 변화가 생겨서 기독교를 믿게 됐는데 그것 때문에 나를 공격한다는 게 말이나 되오? 일단 들어와서 차나 한잔씩 마십시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놀랐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듯한 사람들을 상대로 또박또박 내 입장을 설명하기가 쉬운 일인가. 그러자 더욱 놀란 건 그들이었다. 벌벌 떨며 싹싹 빌 줄 알았던 내가 당당하게 나오자 오히려 그들이 당황하는 듯했다. 잠시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네가 배신을 하고도 잘살 수 있을 것 같아?” “차를 마시든지 꿀을 먹든지 혼자서 잘 먹고 잘살아라!” 입에 담기 어려운 험한 욕설들을 퍼붓고 그들은 떠나갔다.

참으로 고마운 하나님의 배려였다. 혼자서 뜨거운 차를 한잔 마시는데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격이 출렁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 드렸다.

그랬다. 나는 한때 승려였고 신도회를 이끌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위대한 하나님을 체험하고 기독교인으로 탈바꿈해 주님의 종이 됐다. 나는 지금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갈보리기도원을 세워 보다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전하면서 나름대로 목회 활동도 하고 있다. 지금도 주위에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부터 나는 내가 체험한 하나님을 알리고자 한다.

◇이평해 목사 약력=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합동선목), 경기대 경영대학원 졸업, 조계종 강원도신도회 회장,조계종 교화위원장 등 역임 ,현 갈보리기도원 원장,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수(비교종교학)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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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하나님의 섭리,하나님의 인도…. 곱씹을수록 실감이 가는 말들이다. 짧지 않은 내 인생의 발자국을 더듬어보면 이 말들은 진실의 차원을 넘어 진리임이 깨달아진다. 그리고 미천한 한 인간의 삶을 통해 펼치신 하나님의 섬세하고도 깊은 섭리에 절로 찬양이 터쳐나온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라고 한 시편기자의 고백이 이렇게도 가슴을 울릴 줄은 예전에 정말 몰랐다. 불교 지도자였던 내가 뒤늦게 하나님의 뜻을 깨우치고 이렇게 뜨거운 가슴을 갖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으로 나를 그렇게 이끄셨다.

나를 전도한 분은 현재 로고스 법무법인을 이끌고 있는 양인평 전용태 장로님들이다. 1995년 각각 춘천지방법원장과 춘천지검장으로 부임해온 두 장로님은 오자마자 지역의 많은 이들을 전도했다. 특히 믿음이 없는 지도급 인사들은 두 장로의 타깃이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핵심이었다. 아마 내 이력이 그들의 구미를 더욱 당기게 했을 것이다.

두 장로님은 평소 시간만 나면 내게 전화를 걸어 만나기를 원했다. 겉으로는 “그냥 식사하면서 살아가는 얘기나 나누자”고 말했지만 내가 그들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춘천지역 홀리클럽 활성화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두 분은 모임 때마다 나를 끈질기게 불러냈다.

그러다가 1997년 9월 운명의 날을 맞이했다. 제법 가을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나는 생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을 맞았다. 나를 소재로 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과 양인평 전용태 장로님 등이 꾸민 그 날의 일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들은 당시 강원도불교신도회 회장이자 춘천지역 유지인 나를 하나님께 끌어내기 위해 ‘협동작전’을 펼쳤다.

“이 회장님,오늘 점심 약속 없죠?”

평소와 달리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양인평 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그날은 토요일이라 오후에 결혼식 주례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일로 바쁜 날이었다.

“법원장님,오늘은 안되겠는데요. 결혼식 주례도 있고 가봐야 할 곳도 있는데요.”

나는 솔직히 내 사정을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 내가 근사하게 한 끼 사겠다는 말까지 보태며 죄송함을 표했다.

“아,그래요. 그런데 이 회장님,오늘 약속 모두 취소해주세요. 너무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오늘 한번만 제 말을 들어주세요. 그러면 앞으로 이 회장님 말은 뭐든지 다 들어드릴 게요.”

평소 같았으면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을 양 장로님이었지만 이 날은 달랐다. 통화를 하면서 한참 머뭇거리던 분이 내 일정을 모두 취소하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럴 수 없다며 몇 차례 정중히 양해를 구했고 양 장로님도 알았다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오전 11시쯤 양 장로님이 불쑥 집으로 찾아왔다. 마음속으로 ‘참 지독한 양반이네. 그런다고 달라지지도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용태 장로님까지 나타난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다짜고짜였다. 내 차를 두 장로님 차가 앞뒤로 에워싸고 나를 강제적으로 끌고 갔다. 도착한 곳은 나도 잘아는 춘천시내의 한식당이었다. 두 장로님에게 양팔을 잡혀 식당으로 들어선 나는 깜짝 놀랐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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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인평 장로님과의 약속 시간을 조금 지나 들어선 식당의 대형 홀에는 100여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지역의 기관장들도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홀 안을 살피니 메인 테이블인 듯한 곳에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분이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상당히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맞다! 조용기 목사다.' TV 화면에서 여러 차례 뵌 적이 있는 그분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조 목사님의 맞은편 자리에 나를 앉으라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무엇에 홀린 듯했다.

"잘 오셨습니다. 조용기 목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이평해라고 합니다."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머릿속에는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다는 생각과 빨리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조 목사님은 사전에 내 이력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 양반,신수가 훤하구먼. TV에서 볼 때보다 실물이 훨씬 낫네.' 등 엉뚱한 생각을 하다 언뜻 내 차 트렁크에 실려 있는 장뇌삼이 떠올랐다. 곧장 나가서 장뇌삼 세 뿌리를 꺼내왔다.

"목사님,스님들이 키운 건데 드실 수 있겠습니까?" 장뇌삼을 내보이며 조 목사님께 물었다. 내 딴에는 일종의 도발이었다.

"저는 스님들이 키우거나 만든 걸 잘 먹고 좋아합니다." 조 목사는 아무 거리낌없이 즉답을 했다.

속으로 '나보다 몇 수는 위구나'하고 있는데 조 목사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자신도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한때 불교에 심취한 적도 있었으며 폐병을 앓다가 한 소녀에 의해 하나님을 알게 돼 병을 고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됐다"는 '미니 간증'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회장님도 하나님을 알게 되면 훨씬 편하고 보람되며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갑자기 창 밖에서 들어오는 반짝이는 빛으로 눈이 부셨다. 그리고는 홀 안이 더욱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조 목사님과 나,두 사람의 민머리에서 반사되는 빛인지,앞으로 내 인생을 새롭게 밝힐 빛인지 몰랐다.

식사는 2시간여 동안 이어졌다. 이날 오후 춘천 공지천 야외음악당에서 조용기 목사 초청 춘천지역 성회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조 목사님이 2시간이나 할애한 것은 그분의 큰 배려였다.

그런데 진짜 사고는 그 다음에 터졌다. 식사가 끝날 무렵 양 장로님이 여기까지 온 김에 목사님 안수나 한번 받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농담조로 답했다. "저는 목사님 안수를 하도 많이 받아 이렇게 대머리가 됐습니다. 이제 그만할랍니다. 산삼을 세 뿌리나 드렸으니 밥값도 치른 셈이고 이쯤에서 그만합시다."

그러나 양 장로님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조 목사님과 다른 사람들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용태 장로님까지 합세해 "그러지 말고 한번 받자"며 또 두 장로님이 내 양팔을 붙잡고 무릎을 꿇도록 종용했다. 나는 도저히 무릎까지는 못 꿇겠다고 버텼다. 결국 주저앉은 상태로 안수를 받게 됐다.

"사랑의 하나님,저에게 능력을 베풀어 여기 있는 이 사람을 구해 하나님의 큰 일을 담당할 수 있는 일꾼으로 만들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성령의 능력을 내리시어 여기 있는 이 사람이 구원의 은총을 받아 새롭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

조 목사님의 절절한 기도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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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부터 강단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쉽게 현혹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내 심지는 웬만한 충격에도 요지부동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처음 받는 안수기도지만 뭣이 달라지랴 싶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님의 안수기도 중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먼저 내 몸이 위로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30㎝는 떠오른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내 몸이 구석으로 힘차게 쳐박혔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달려들어 내 몸을 요동치지 못하게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내 몸은 발광을 해댔다.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나왔고 신체의 모든 구멍에서 물기가 새어나왔다. 혼자 수십명의 장골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상태가 얼마 동안이나 지속됐는지 모른다. 진정된 뒤 내 얼굴과 머리,옷은 만신창이가 됐다. 주위 사람들에겐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오직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크게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하는 종이 될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자리에 누웠다. 신기하게도 머릿속이 맑았다. 아니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가운데 불현듯 바로 그 날 오후 6시에 공지천에서 열린다는 성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애써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새록새록 궁금증이 생기는 걸 어쩌지 못했다. ‘성회는 어떻게 열릴까?’ ‘성회에는 몇 명 정도가 참석할까?’ ‘조용기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정장이 아닌 점퍼 차림이었다. 혹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걱정에 챙이 넓은 모자까지 눌러 썼다.

공지천 야외음악당에 간 나는 깜짝 놀랐다. ‘워낙 유명한 목사이니까 500명 정도는 모였겠지’라고 생각한 내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적어도 3000명은 넘는 것 같았다. 나는 슬금슬금 “주여!” “아멘!”을 외쳐대는 군중에게 다가갔다.

“아니,이 회장님 아닙니까?” 등뒤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그를 몰랐지만 그는 나를 알아봤다. 낮에 식당에서 한바탕 ‘난리’를 친 터라 그때 그 식당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나를 알아볼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남진 장로였다.

“회장님,앞으로 가십시다. 안 그래도 회장님이 오실 것 같아 자리를 만들어 놨습니다. 조 목사님께서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그는 내 팔을 잡고 끌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기분도,그럴 계제도 아니었다. 완력으로 그를 뿌리쳤다.

“지금은 갈 수 없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가기로 하고 오늘은 잠깐 구경만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양해하십시오.”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후회스럽기도 하면서 뭔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날 밤은 참으로 길었다. 밤새 깊이 잠들지 못하고 온갖 상념들이 떠올라 뒤척거렸다. 부처님이 떠오르는가 하면 예수님이 떠오르고,평소 꿈도 꾸지 않았던 갖가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렇게 날이 새자 더 큰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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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마자 양인평 장로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잘 잤느냐”며 대뜸 “급한 일 때문에 찾아오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나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전날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수많은 불교 신도를 이끌고 있는 내가 조 목사의 안수기도에 구석으로 처박혀 눈물 콧물을 쏟아낸 일이 무슨 불륜이라도 저지른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내 마음 한 구석에선 이상한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뭔가가 있다. 그렇지 않고는 천하의 이평해가 안수기도 한번에 나자빠질 수는 없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양 장로님이 왔다. 나는 딱 부러지게 동행을 거절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그게 아니었다. 못 이기는 체 옷을 갈아 입고 양 장로님을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느 새 내 차는 양 장로님의 뒤를 따라 경춘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도착한 나는 또 다시 놀랐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본 건 난생 처음이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꼬부랑 노인네까지,건장한 청년에서부터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환자까지,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에서부터 남루한 행색의 노숙인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뒤섞여 교회 문을 들어서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뭣이 있긴 있구나’하는 생각이 또 다시 들었다.

나는 군중에 떠밀려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산 넘어 산이었다. 밖에서보다 더욱 놀라웠다. 아직 예배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저마다 기도를 하고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는 사람,소리 치며 기도하는 사람,끼리끼리 손을 잡고 기도하는 사람,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사람들…. 당시의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 장로님이 일러준 대로 6층으로 올라갔다. 선교연합회 사무실에 들어서자 연합회장인 김용운 장로님을 비롯해 많은 목사님과 장로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이산가족과 상봉하는 것처럼 반가워했다.

“자,이제 기도합시다.” 김 장로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모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목사님의 기도가 시작됐다. “하나님,오랫동안 길 잃고 헤매던 한 마리의 어린 양이 이제 하나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희는 이 양을 하나님의 품안에 영원히 거하도록 하고자 합니다….” 보통 때보다 오래 기도가 계속됐다. 나도 기도하는 시늉을 했지만 마음은 다른 데에 있었다. ‘참 희한한 사람들이야. 틈만 나면 기도를 해대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모두 “아멘!”을 외쳤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우르르 몰려나갔다. 나도 그들을 따랐다. 조용기 목사님의 대기실이었다. 목사님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목사님도 나를 만나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객기가 발동해 “목사님,조금 전에 기도하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또 한번 나를 위로했다. “아,예. 기도는 여러 번 하면 더 좋습니다. 회장님은 앞으로 하나님 나라를 넓히는 데 큰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날 나는 그야말로 얼이 빠진 상태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고 나자 또 하나의 이벤트가 준비돼 있었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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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기독교 체질인가? 아니면 내가 하나님께 꽉 찍힌 건가?’

참으로 희한한 현상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갔다온 그날,그러니까 1997년 9월11일부터 내 맘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미풍이긴 했지만 나 자신이 충분히 감지할 정도는 되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오산리기도원을 갔다온 그날 일이 다음 날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따르릉∼” 아침 일찍 전화가 걸려왔다. 직감적으로 양인평 장로님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이번엔 김용운 장로님이었다.

“저 김용운 장로입니다. 오늘 별일 없으면 점심식사나 같이 하시죠.”

“아,예. 좋습니다. 교회에서 만납시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김 장로님의 제안에 응했다. 그리고 만날 장소를 식당이 아닌 교회로 정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교회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아닌가.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변화가 내게 일어나고 있는 증거였다.

그랬다. 나는 변화됐다. 그때부터는 누가 데리러 오지 않아도,누가 전화를 하지 않아도 매주 주일이면 스스로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달려갔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즐겁게 교회로 발길을 향했다. 찬양이나 예배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해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조용기 목사님과 여러 장로님이 무척 좋아했다. 그런 차에 조 목사님께서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집과 그 일대는 내가 불교 성지를 만들려고 조성한 곳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탑을 세우고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을 만들어 불교인들의 자존심을 드높일 수 있는 성지로 꾸미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춘천 길목의 경치 좋은 곳에 3만여평의 땅을 구입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을 조 목사님이 찾겠다는 것이었다. 목사님께서는 “근처에 일이 있어 가는 길에 방문하겠다”고 하셨지만 내 느낌으로는 일부러 오겠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워낙 영적인 혜안을 가진 데다 명민한 분이라서 뭔가 짚이는 게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11월24일 조 목사님은 몇몇 목사,장로님들과 함께 오셨다. 오자마자 기도를 한 다음 조 목사님은 준비해온 성경책을 주셨다. 그리곤 “이 회장님,이곳을 하나님께서 요긴하게 쓰실 것입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분은 필시 내가 주님의 종이 되고 그 땅도 하나님의 성지로 바뀔 것이라는 걸 예감하신 것이었다.

나는 조 목사님께 받은 그 성경책을 지금도 애지중지하고 있다. 워낙 오래 사용해 너덜너덜해졌지만 책상머리에 꽂아놓고 소중히 다루고 있다.

여기서 잠깐 성경책 이야기를 하면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찌감치 예정돼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조 목사님께 받은 그 성경책은 내가 24번째로 선물받은 성경책이다. 다른 종교 지도자까지 지낸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성경책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춘천교도소 교화위원장으로 지내면서 목사님들과 가끔 의견을 나눌 때가 있었는데 그분들은 꼭 나에게 성경책을 선물했다. 그렇게 받은 성경이 20권을 넘겼고 양인평 장로님에게서 22번째,김용운 장로님에게서 23번째 선물을 받은 데 이어 조 목사님께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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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 이평해 (8) 결단끝 불교 물품 불길에 던져버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장로님께서 제게 용기를 주십시오!”

1997년이 저물어가던 때 나는 아무 연락도 없이 양인평 춘천지방법원장 방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내 심정을 밝혔다.

“아니,그게 무슨 말입니까?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십시오.”

양 장로님은 갑작스러운 내 말에 의아해 하며 물었다.

“제가 갖고 있는 불교 물건들을 모두 폐기해야겠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모든 걸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양 장로님은 놀라면서도 반가운 눈치였다. 그렇게 전도하려고 애썼던 내가 자기 발로 찾아와 자기 입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행동으로까지 해보이겠다는데 얼마나 좋았겠는가. 나는 그때 이미 여의도순복음교회 실업인선교회 산하 성도개발자문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성도들을 상담하면서 몇 차례 간증을 하기도 했다.

해를 넘긴 1998년 1월23일 삼악산 내 별장에 다섯 사람이 모였다. 나 외에 춘천순복음교회 김주환 목사님,양 장로님,강원일보 사장인 조남진 장로님,그리고 강원대 교수님 등이었다. 우리는 전쟁터로 나서는 전사와 같은 마음으로 거실에 앉아 비장하게 기도를 드렸다. 김 목사님은 내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별도로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뒤로 수십 그루의 천년송을 병풍 삼고 앞으로는 소양강을 내려다보는 그야말로 절경에 위치한 별장 마당에 그동안 내가 보물처럼 여겼던 물건들을 하나씩 내놓았다. 불상 목탁 불화 등 있는 모두 끄집어냈다. 하나씩 뜨거운 불길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였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엄청 어려운 일이었다.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내 몸을 얼어붙게 했다. 온몸에 왕방울 같은 소름이 돋아나 마치 갑옷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주여! 주여!”를 외쳤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주여,제게 용기를 주소서. 주님의 능력으로 이것들을 태우고 부수게 하소서. 주여! 주여!” 옆에 있는 네 분도 크게 외치며 기도했다.

얼마나 그랬을까. 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하더니 얼음 같던 몸이 불덩어리로 변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무얼 하느냐. 속히 처리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 조금 지나면 네가 죽는다. 빨리 처리해라!” 나는 “감사합니다”를 연방 외쳐댔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물건들을 망치로 부수고 불속으로 던져나갔다.

불과 1시간여 동안 진행된 일이었지만 내겐 영원처럼 느껴졌다. 모든 일을 끝내자 우리는 그 자리에 엎어져 기도했다. 나는 목청껏 외쳤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일을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오늘 저의 모습을 보셨죠? 앞으로 저를 구원해주신 주님만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소서!” 섭씨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도 우리의 몸은 후끈 달아올랐다.

어둠 속에 내려온 우리는 말없이 춘천시내로 들어와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비로소 긴장이 풀리며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서로 밥값을 내겠다며 유쾌한 실랑이를 벌이며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교회에 달려가 조용기 목사님께 알리고 다시 안수기도를 받았다.

정리=정수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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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평해 (9) 믿음 생기자 ‘성령의 목소리’ 들려



“주님이 부르실 때에 순종하며 주 앞에 엎드렸네/세상에 귀한 나의 모든 것 하나 둘 거두셨네/주님 사랑 이제 알았네. 어리석고 미련한 나의 모습/더러운 세상 옷 던져 버리고 텅 빈 손 내밀었네/주님 은혜 감사하면서 순종하며 주님께 찬양하리/귀하신 주 보혈 증거하면서 영원히 찬양하리/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의 빈 손을 내게 다오/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축복 네게 주리니/너의 빈 손을 내게 다오 너의 손 붙들리니(후렴)”

위의 글은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을 약간 바꿔 찬양사역자인 남정순 전도사가 곡을 붙인 성가이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노래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보다도 항상 노래 가운데서 예전의 상황들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가슴에 사무치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한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 1998년이 새해가 밝으면서 나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몸과 마음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한참 뒤에야 깨달았지만 그 소용돌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베푸시는 크나큰 은혜의 잔치였다.

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일단 거둬가셨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물질적으로도 상상을 초월한 액수를 포기했다. 나는 아깝지 않았다. 단지 아내와 아이들이 남편과 아버지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피하는 게 무척 힘들었지만 그 또한 견딜 만했다.

내가 불교 관련 소장품들을 모두 폐기한 뒤 두번째로 맞은 주일,그러니까 2월1일 나는 또 한번 희한한 경험을 했다. 완전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고 주일예배에 참석해서인지 마음 상태가 여느 때와 달랐다. 교회에 나가자 몇몇 장로님들이 오늘은 외국인석에 앉자고 해 따라갔다.

성전으로 들어서자 실내는 이미 수많은 성도들의 기도로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많은 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기도를 했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라고 여기며 나도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내 마음속이 심상치 않았다.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입이 저절로 실룩거려지는 것이었다. 그리곤 무당이 굿판에서 하는 소리 같은 것이 내 입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방언이었다.

나는 외쳤다. “주여! 주여! 왜 저를 무당으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그건 마음속의 외침이었지 입으로는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얼마나 그랬을까. “얘야,너에게 막중한 임무가 있으니 잘 수행하거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나는 비로소 제대로 기도하게 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 세상 끝날까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막중한 임무를 기꺼이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방언이 터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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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평해 (10) “불교 성지 만들 땅에 기도원 건립”



비로소 나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편입됐다. 외형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하나님 한 분만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을 만큼 바뀌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첫번째 시험이 앞을 가로막았다.

1998년 설날이었다. 우리나라의 관습대로 제사를 지내야 하고 그러려면 지방을 써놓고 절을 해야 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불교계의 지도자였고 누구보다 유교적인 전통에 충실했던 내가 자식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하나님,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게 지혜를 주세요. 오늘 당장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하기는 정말로 어렵습니다. 일단 오늘의 난국을 넘길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가족이 제사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방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제사가 시작됐다. 아이들은 평소 해오던 대로 넙죽 절들을 했다. 나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이들이 절하는 걸 아무 말 없이 지켜보면서 앉아 있었다. 그렇게 절을 하지 않고 제사를 끝냈다. 아이들은 내가 절을 했는지,그냥 무릎만 꿇고 앉아 있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알면서도 아버지의 처지를 이해해줬는지도 모른다. 조상 제사에서 절을 하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주여,주님의 뜻에 따라 했습니다. 비록 유치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하지 않겠지만 순종하고자 하는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제게 더 큰 믿음을 주시어 어떤 난국과 시련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제사를 마친 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내 신앙심은 하루하루 커지고 여물어갔다. 그야말로 일취월장이었다. 나 자신이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나만이 아니었다. 주위 장로님들도 나만 보면 “이 위원장님의 믿음이 놀랍도록 좋아지고 있다”고 한 마디씩 했다. 사실 신앙심에 대한 칭찬만큼 듣기 좋은 것도 없었다. 또 그런 칭찬만큼 쑥스러운 것도 없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앙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깊어지게 해야 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그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나에 대한 다음 계획을 펼치셨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나와 친한 몇 명의 장로님들이 건네는 말이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 옆에 기도원을 세우면 아주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받아넘겼다. 그러나 여러 차례 듣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불교 성지로 만들고자 준비한 땅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면 상당히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일 것 같은데,그러면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인데,하나님께서 이후에 더 큰 역사를 만드실 것도 같은데….’

며칠을 깊이 생각한 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곳에 하나님의 성지를 만들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이 사실을 주위에 알렸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다짐하고 일단 사연 많은 그 땅에 기도원을 세우기로 했다”고 공표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오는 6월23일 기도원 개원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많은 분이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뜻밖의 전갈이 왔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불과 1주일이었다. 도대체 이 기간에 어떻게 건물을 세운단 말인가?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
============================================================================================역경의 열매] 이평해 (11) 1주일만에 기도원 완성…감동의 출발




“하나님,1주일 안에 기도원 건물을 짓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저로선 최선을 다하겠지만 안되면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역시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었다. 몇 군데 건축업자에게 알아봤지만 한결같이 어렵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집 뒤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매달렸다. 나는 그때 나만의 기도처소를 갖고 있었다. 빽빽한 산림 속에 꿇어앉아 기도할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놓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곳을 찾았다. 거기에는 내가 직접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걸어놓았다.

바로 응답이 왔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100평이 넘는 기도원 건물을 완성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제법 쓸 만한 건물을 세웠다. 덕분에 그곳에서 많은 목회자 성도들과 개원예배를 드렸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즈음 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연재 서두에서 밝힌 대로 ‘배신자’ ‘배교자’로 찍힌 내겐 연일 공갈과 협박이 날아들었고 심지어 집으로 많은 사람이 쳐들어오기도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 곳곳에서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나는 불미스러운 일을 당할 것에 대비해 언제나 가스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그러나 내게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하나님이라는 ‘빽’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모든 어려움을 능히 극복하도록 해주셨다. 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죽음까지도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이에 관한 내용은 연재를 시작하면서 밝혔다.

그럼에도 6월22일,개원예배 당일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끊임없이 날아드는 협박이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싶어 경찰에 보호를 요청했는데 뜻밖에도 200여명의 병력이 주위를 감쌌다. 그리고 내 처지를 아는 주위 목사님들이 대거 참석해주셨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참석한 목사님들은 앞다퉈 나의 손을 잡으면서 격려했다. 모두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드려진 예배는 참석자 모두에게 큰 감동과 은혜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후 어느 정도 혼란이 정리되자 희소식이 날아왔다. 조용기 목사님이 직접 오셔서 부흥성회를 인도해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날짜는 8월11일로 정해졌다. 나는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기도원을 쓰실 것이라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부흥성회를 성대하게 열 계획으로 나는 춘천 가평 등 일대에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전단도 돌렸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뜻밖에도 춘천지검에서 통지서 한 장이 배달됐다. 내가 산림법 건축법 등 위반으로 고발됐으니 출두해 조사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곳에 지었고 산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무슨 범법을 했다는 말인가.

결국 조사를 받았다. 수십년 전부터 길은 닦여 있었고 내가 살던 집도 이미 앞선 주인이 주택을 지어 살던 곳이라고 항변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들어보지도 못한 법 내용을 들이대며 내가 법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그래,이놈들아 마음대로 해봐라. 나에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니 별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어코 나를 감옥에 가두었다. 형사 두 명이 찾아와 따라갔더니 창살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밝은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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