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양식/믿음의 선진

[스크랩] [믿음의사람] 고난 속에 피어난 참 의인, 이창실 목사

153뉴스 tv 2007. 1. 19. 03:51

1921년.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운 상해 군관학교 졸업식이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창실: “이 자랑스런 우리 민족의 학교를 졸업하면서, 이곳에서 배운 대로 나라를 세우는
데 이 한 목숨 바칠 것을 더욱 다짐합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을 하던 그가 바로, 독립운동가로, 또 목회자로 한 평생을 바친
이창실 목사였습니다.

이창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그는, 보기 드물게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 생활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는데.

이창실: “평범한 교사로 인생을 마칠 것인가? 아니다.
아직 복음을 모르는 수많은 동포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목회자가 되는 게
더 값진 삶일 것이다.”


결국 1918년, 그는 29세의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며 그는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창실: “이번 목표물은 일본 경찰 청사입니다.
이곳만 폭발시킬 수 있다면 일본에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순사: “(문 쾅! 열리며) 꼼짝 마라! 모두 손 들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헌병들에게 발각되었고, 그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져,
곧바로 상해로 망명해 상해 사관학교에 입학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임시정부의 무력항쟁 명령을 받고 다시 국내로 잠입하는데.

이창실: “이번 거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단 한치의 실수라도 있는 날엔,
우리 모두 목숨이 위험합니다.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결국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5년 간의 끔찍한 수감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창실: “으아아악~~~! 헉헉…”

일본천황의 생일 특사로 풀려난 그가 찾은 곳은 바로 평양 신학교.
다시 공부를 시작한 그는, 입학한 지 18년 만에야 결국 졸업을 하게 됐고,
드디어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이창실: “하나님, 이 못난 종, 이제야 당신 앞에 섭니다.
허락하신다면 당신의 양을 먹이게 하소서.”

하지만 그의 목회 생활은 또 한번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광복 이후 이북에 들어선 공산정권이 교회를 탄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성도: “목사님, 제발 남쪽으로 몸을 피하세요.”

이창실: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품을 떠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 일터는 바로 여깁니다!”


결국 1949년 4월. 부활주일 예배 인도를 마친 이 목사에게 공산당원들이 다가섰고,
그들을 따라 간 이 목사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탕! 하는 총성음”
평범한 교사의 생활을 접고 불타는 마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웠던 이창실 목사.
그 어떤 고난과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함으로 의의 길을 걸어 갔던 그의 삶은,
혼탁한 세상에서 타협하기 쉬운 우리들에게 참 의인의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출처 : 연수임마누엘교회
글쓴이 : 주님닮기원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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