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기독신문TV/신앙과시

필사즉생, 필생즉사

153뉴스 tv 2018. 12. 11. 05:38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속 정유년 9월 15일자에 나오는 구절로 명량해전을 하루 앞두고 장수들에게 당부한 내용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가슴에 담고, 큰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한걸음씩 협력해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한 마리의 여우가 토끼를 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우는 토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여우는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뛰었지만 토끼는 살기 위해 뛰었기 때문입니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살려고 비겁하게 굴면) 죽을 것입니다.

 

누구의 간절함이 절실할까요?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대한민국의 현 위기도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전면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면적인 대검토를 가져야 할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반복적으로, 흥망성쇄의 길을 걷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삿8:1-3)

 

미디안 전투에 에브라임 지파를 늦게 불러 승리의 전과를 평가절하시킴으로 소외시키려고 했다는 것이 불만 제기의 이유이다.

그러나 이런 불만을 제기하는 에브라임 지파의 공격은 너무 얍삽한 짓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자기들이 선조로부터 획득해온 기득권의 혜택들을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수를 친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승리는 곧 패배라는 것을 말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지명하신 300명이 아닌 자기의 의지와 머리 굴림으로 다른 지파들을 끌어 들여 숫자와 전쟁의 범위를 확산했습니다.

3만1700명을 돌려보내신 주님의 의도를 정면으로 무시한 불신앙의 행태를 기드온은 하나님 앞에서 자행한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는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바로 간절함의 차이입니다. 이 간절함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내 고향, 전북은 아직도 잠잠합니다.

특히 전북지역 목회자들의 의식도 동일합니다.

엉거주춤한 태로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르다며

온갖 방법을 가지고 공격하는 그분이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지금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는지요?

 

이 아침에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야기가 먼발치에서 들려옵니다.

이스라엘은 사실상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 주위를 돌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한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의 순종입니다.

대한민국 위기를 직시하면서 에브라임 지파가 취한 행동이나 그저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하실련지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여호사밧왕이 3개국이 연합한 공격을 받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 여호사밧은 금식하며 도움을 구합니다.(역대하20:15-17)

 

여호사밧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에 대해 작전 지시를 하십니다.

“너희들보다 큰 무리가 온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