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V/사람과사람

한국의 여성순교자 문준경전도사

153뉴스 tv 2009. 3. 14. 17:50
문준경 전도사    



한국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문준경전도사가 설립한 섬교회
를 통해 배출하였다.
한국의 수많은 순교자 가운데 여성순교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그 이유는 순교자가 집중적으로 나온 일제시대나 6·25사변 당시는 여성이 사역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극히 적었으며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적이라 여성의 활동영역이 매우 제한되고 또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성결교단의 문준경(文俊卿·1891∼1950)전도사의 경우는 여성사역자로서 성결교를 대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헌신적인 사역과 활동이 순교 49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문전도사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교회, 진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10여 교회는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목사 등 30여명)을 배출하는 믿음의 산실이 되었다.그녀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헌신, 사역은 섬을 중심으로 한 호남선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8년 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해야 했다.


1933년의 문준경전도사
문준경전도사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정규학생
이 되지 못했고 그나마
이성봉목사의 추천으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청강생으로 신학을 공부
했다.

그러나 서로 마음이 합하지 않은 결혼은 두사람 모두에게 고통이었다.외지를 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목포에 소실을 두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었고 문준경은 이 때부터 자신은 ‘남편있는 생과부’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야 했다.그러나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데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그리고 남는 시간을 시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국문을 깨우치고 한문을 공부하는데 할애했다.

자신을 극진히 아껴주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큰 시숙과 생활하게 돼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이런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줄기 놀라운 빛으로 다가왔다.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李聖鳳)목사(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성결교회였다.

이성봉목사의 설교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낙도 없었던 그녀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안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기대와 기쁨을 채워 주었다.1년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가장 열성을 보이는 성도가 되었다.

집사직분을 받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그리고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전신)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 결과 청강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다.당시 결혼한 여자는 입학할 수 없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공부를 열심히 해도 정규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학금도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던 그녀는 이성봉목사의 보증과 요청으로 결국 정규학생이 되어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전도사의 전도열정은 남달라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33년 진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35년 증동리교회, 36년 대초리교회를 차례로 건립했다.방축리에는 기도소를 지었다.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교회를 세운 그녀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쉬지않고 따랐으나 기도는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었다.

졸업 후에도 대도시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 온 문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이섬 저섬 무교회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그녀는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노릇, 우체부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섬주위 돌짝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1년에 고무신을 아홉컬레나 바꿔신었다고 전해진다.문전도사의 열정적인 기도는 신유의 은사까지 더해 정신병자, 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해산됨과 동시에 문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까지 여파가 미쳤다.그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경찰서로 불러내 고문을 일삼았다.

이 때마다 문전도사는 찬송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장16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는 허락치 않았다.

그런데 해방후 공산당을 따르는 좌익들의 활동은 이 작은 섬까지 영향을 미쳤다.특히 6·25 후 지역 전체가 인민군의 손길에 넘어가자 평소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들이 문전도사와 성도들을 못살게 굴었다.

50년 10월 4일.국군이 증동리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끌어 냈다.그리고 한사람씩 단도로 내려쳐 죽이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문전도사에게 와서는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만”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고 그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이어진 총탄에 의해 순교했다.당시 59세.이 사실은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전도사에 의해 알려졌다.

문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톨의 밀알이 되어 30배, 60배, 1백배의 열매를 거두었고 그녀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내가 본 문준경전도사… 김준곤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총재)>

내 삶과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바로 순교자 문준경전도사님이다.전도사님은 내가 국민학교시절 외롭게 사시던 어머니를 위해 나룻배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찾아오시곤 했다. 한아름의 과자선물과 함께 나를 껴안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문전도사님이 특유의 아름다운 음성으로 희망가나 천당가를 부르면 동네 아낙들이 모두 모였고 이 때부터 일장 전도가 시작됐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몸이 약해 전도사님이 사역하던 섬에서 3개월간 지낸 적이 있다.교회와 사택은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의 휴식처였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아기를 받고 병을 치료해 주고 사랑이 가득 담긴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일제시대에 장티푸스가 나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가족도 환자곁에 가지 않는 가운데 “나는 죽어도 홀몸이니 부담이 없다”며 환자를 돌본 이야기는 유명하다.순교 1주년이 된 전도사님의 환갑날, 장례추모식장에는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김구선생 장례식 보다 추모인파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추모와 사랑과 존경을 전도사님의 영전에 드린다.

한국기독교 - 그뿌리를 찾아서(순교자열전) : 김무정